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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리다. 하지만 다행히 비는 오지 않는다.

아침 매표소가 열기 전에 겸사 겸사 관광명소를 들른다. 입장료를 안 내도 되는 것은 물론, 오늘 돌아다녀야 하는 시간을 뺏지도 않을 만큼만 쬐끔 시간을 낸다. 정말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철저하시다. 어지간하면 다들 이런 곳에 와서는 놀러다닐 것 같은데 말이다. 하하

아무튼 그 짤막한 시간 동안 중문에서 가까운 천지연인가 천제연인가 하는 폭포를 구경했다. 어디인지도 확인 못하고 쓱...

 

 

다음은 주상절리가 있는 곳으로 차를 타고 가서 다시 한 번 쓱...

 

 

이거 무슨 수학 시간도 아니고 돌이, 돌이, 육각형이다. 하하. 이 무슨 일이...

 

 

그래서 이상하다 싶어 건너편을 보니 거기도 돌이 육각형이 삐죽 솟았다. 바다 색은 기가 막히네. 내가 본 바다 가운데 두 번째다. 첫 번째는 96년에 강릉에서 부산으로 버스를 타고 가면서 본 바다 색깔. 그건 지금도 잊지 못한다. 어디 지중해를 가서 보면 달라질까나?

 

 

중문을 들른 뒤, 서귀포 5일장에서 왕콩(경북 영주)과 노랑갯나물(노란빛이 남)을 구입했다. 이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한참을 돌다가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것이 있을 수도 있으니 그런 걸 구입했다. 다음은 저 위에 돈네코인지 섭코인지로 올라갔다. 오르는 길에 집도 없고 한참 헤매긴 했다.

 

 

돈네코로 오르던 길에 바라본 제주도 남단. 군데 군데 허옇게 보이는 것은, 놀라지 마시라! 눈이 아니라 비닐하우스다! 비닐의 물결이 펼쳐진 모습.

 

상법호촌이라 지도에 표기된 곳으로 올랐는데 몇 집이 없다. 제주는 지도에 표기된 것과 실제 있는 집과 차이가 많다. 아예 사라진 마을도 많은 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래도 여기는 사람이 좀 사는 듯하여 다행이다. 일단 차를 세우고 돌아다니는데 무가 심상치 않다. 다른 곳에서 본 것과 달리 엄청 동그랗고 크다. 이건 단지무?

혹시나 하여 주인이 누구인지 찾았으나, 주인은 없고. 일단 많은 것 가운데 두 개만 뽑고 주인집으로 생각되는 곳에 편지와 선물을 남겼다. 그랬더니 나중에 전화가 왔다. 확실히 현물을 주고 오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차이가 많다. 아무것도 주지 않고 그냥 오면 도둑질한 것 같아 영 찝찝하지만, 뭔가 보답을 주고 오면 그렇지 않다.

 

 

돈네코에서 내려와서 여기저기 돌아봤지만 다들 감귤만 있다. 이럴 바에 내가 가고 싶어 하는 곳으로 한 번 인도할까? 70년 전 다카하시 노보루가 찾았던 마을로 이끌었다. 어쨌든 가는 길이고 하니 그렇게 간다한들 크게 시간을 뺏을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찾은 보목리. 볼레낭이란 제주말의 나무가 많아 이런 이름이 정해졌다고 한다. 안완식 박사님께서 확실히 해주시기 위하여 아는 후배 가운데 제주 출신에게 전화하여 볼레낭이 뭐냐고 물으니, 보리수 나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보리수 나무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여기 제주도는 날씨가 따뜻하여 축축 늘어지는 나무가 주종이라고 알려주셨다.

 

 

70년 전에도 서 있었을지 모르는 팽나무. 여기는 보목리다. 이 마을을 좀 돌아다니다 할머니들을 만났는데, 토종은 둘째치고 다른 건 물어보기도 힘들어 관두었다. 다음에 찾아가면 뭔가 알 수 있을 것 같은 보목리. 일단 Keep!

그리고서는 다시 차를 타고 출발!!! 표선면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본 동백꽃. 너무 예쁘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잘 꾸몄는데, 너무 화려하지도 않고, 천박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소박한 멋도 아니고, 아무튼 동백은 제주를 다니면서 안완식 박사님 덕에 참 잘 보았다. 내가 본 동백만 해도 여느 곳의 동백은 별 것 아닐 정도... 하하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읍민속마을을 들렀다. 민속마을이니 뭐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돌았는데 민속 말고는 볼 것이 없었다. 똥돼지... 새를 엮어 지붕을 이은 집... 말뼈로 만들었다는 골다공증 치료제... 똥돼지 볶음이 나오는 밥... 오매기술을 기대했는데 그 집은 문을 닫아 마실 수 없었다.

 

 

똥돼지... 그래도 먹을 것도 주고 물도 주니, 그냥 전시만 한 것과는 대우가 다른 셈.

 

물이 귀한 제주는 이렇게 빗물도 활용했다. 지금 돌아다녀보니 제주는 지하수를 너무 뽑아 써서 앞으로 물 부족으로 큰일이 나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다시 이 시대로 돌아가야지 뭐. 

 

 

성읍마을의 성. 이건 성이라기보다는 권위를 내세우기 위한 성이다. 성의 본연의 목적인 군사적인 방어는 하나도 없는 듯하다. 솔직히 나 같은 사람들이 달라붙으면 여기저기서 넘어갈 수 있는 정도다. 그러니 이건 목적보다 수단으로 세운 하나의 상징물이 아닐까 생각한다. 제주도 사람들을 이걸 통해서 눌러보자고 생각했겠지. 섬마을 사람들이 워낙 드세니 그런 권위도 필요했을지 모른다. 이런 짓을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일본놈들도 똑같이 반복했고, 그 뒤에 들어온 미군정을 업은 이승만 정권 사람들도 반복했으니... 뭍에 것들이라면 이가 갈릴 만도 하지 않는가?

 

성읍마을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다시 표선읍으로 돌아가 잠자리에 들었다. 그 과정에서 불었던 바람, 정말 차를 흔들거리게 만드는 바람이었다. 감귤밭 사이로 난 길을 헤맨 기억, 지도에도 나오지 않아서 많이 당황했다. 마을 표시를 보고 갔건만 뜻하지 않은 폐촌, 그럴 때는 등에 땀이 쓱 흐를 정도로 같이 간 분들께 미안했다.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이렇게 글로 푸는 것이 한스러울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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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28일, 구름은 잔뜩이지만 날은 따뜻하다. 어제 질펀하게 놀았던 성락재星落齋에 잠시 들렀다. 잠시 볼일을 보러 밖에 나갔다 제주의 밤하늘에서 쏟아질 듯한 별을 보고 떠오른 것이 이 집의 이름이 되었다. 이 집의 주인 어른은 아스팔트와 관련된 큰 사업을 하고 있는 분인데, 매화에 미쳐 전국에 있는 이름난 매화는 전부 제주로 모아왔다. 오늘은 출발에 앞서 잠시 그걸 보러 온 것이다. 

 

 좋은 시설에서 건강히 자라고 있는 무수한 매화나무들. 12월 말인데 벌써 꽃망울이...

 

어떤 것은 벌써 활짝 피기까지 했다. 제주라서 가능한 일이... 

 

 

오늘은 대정읍 신평리 쪽부터 훑어 나가려 한다. 열심히, 부지런히 돌아다니지만 오늘도 별 소득은 없다. 중산간과 해안의 마을은 확실히 차이가 크다. 신평리 364번지에서 땅가지라는 것만 하나 얻었다. 그것도 주인이 자리를 비워서 대문의 명패를 살피고, 우편물을 뒤져 간신히 주소와 이름을 알아낸 것이다. 그와 함께 77번지의 김재범 씨의 집에서는 호박을 하나 얻었는데, 이 호박은 골이 없는 게 특징이다. 그 이후에는 길거리에 자라고 있던 염주와 부용, 댑싸리를 채집했다. 댑싸리는 얼마나 키가 크던지 내 키를 훌쩍 넘어 2m 이상이었다.

 

길거리에서 채집한 댑싸리. 키가 얼마나 큰지 담장 위로 삐죽 올라왔다.

 

길을 헤매고 돌아다니면서 본 한 집의 창고 벽. 보통 흙만으로 벽을 치는데, 제주에서는 돌이 흔해서 그런지 돌이 박혀 있다. 

 

 제주의 돌담. 참 잘 주워다 쌓았다. 이런 일을 하는 기술자도 따로 있었다는데 다음에 만나면 재밌겠다.

 

 

이제 중산간으로 올라간다. 이번 행선지는 서광동리. 중산간으로 올라가는 만큼 뭔가 나오지 않을까 한다. 제주는 흙과 돌이 물을 잘 머금지 못하고 뱉기에 꼭 물이 있는 곳에 마을이 생겼다고 한다. 요즘 새로 생긴 마을이 있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제주에서 마을이 있는 곳은 물과 관계 있다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헌데 요즘 중산간에서까지 농사를 지으면서 지하수를 엄청 퍼올려 농사를 짓고 있다. 이게 지금 당장은 괜찮지만, 언젠가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까? 제주를 다니면서 본 개천에서는 물을 한 방울도 찾아볼 수 없었다. 원래 제주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지나치게 지하수를 뽑아 쓰면 분명 문제가 생길 것이다.

서광동리에 올라 기대를 안고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한 할머니를 만났다. 가까이 다가가 인사 하고 말을 건네니, 이 동네도 다 감귤을 많이 하고 자기 집에 콩이 좀 있다고 하신다. 고정순(63) 할머니의 집인 서광동리 261번지에 찾아가서 두 종류의 준자리콩을 얻을 수 있었다. 하나는 올씨이고 다른 하나는 늦씨인데, 늦씨가 더 맛있다고 한다. 크기는 더 작고 노랗다. 이후는 더 볼 곳이 없어 다시 차를 타고 더 윗쪽인 동광리로 이동했다.

동광리 499번지에 사시는 고순조(66) 할머니 댁에서는 한창 김장을 담그고 계셨다. 딸인지 며느리인지 두세 명과 함께 열심히 속을 버무리고 계신 할머니께 맛있는 김장김치도 하나 얻어 먹고 토종에 대해 물었다. 정신 없으신 와중에 저기 콩을 예전부터 심던 것이라며 일러주셔서 몇 움큼 얻어 왔다. 이건 장콩으로 쓰는데, 올씨이고 연두색을 띠고 있다. 더 있는 건 귀찮게 하는 일이라 생각하여 인사를 드리고 집을 나왔다.

 

 

이곳에도 일본에 나가 돈을 벌어 마을을 도운 사람의 기념비가 서 있다. 제주와 일본은 그 가까운 거리만큼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인가 보다. 

 

 

 

고픈 배를 안고 잠시 식당에 들렀다. 마침 동광리 마전동에 식당 하나가 보여 생각할 것도 없이 그리로 들어갔다. 다들 국물을 먹으며 속을 풀고, 곧바로 토종 수집에 나섰다.

이번은 지도로 보면 더 윗쪽이라 뭔가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만드는 그런 곳이다. 바로 광평리라는 곳이다. 중산간이지만 너른 들이 있기에 광평리라고 하지 않았겠는가. 그런 곳인만큼 예전부터 농사짓는 사람에게는 토종이 있을 법하기에 기대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가서 보니 이곳은 너무 높아서 외진 곳이라 그런지 사람이 별로 살지 않았다. 기껏해야 서너 집이 전부일 뿐이다. 이렇게 된 거 한 집 한 집 하나하나 들러서 물어보아야겠다.

광평리 200번지에 사시는 구춘옥(76) 할머니 댁에서 메밀을 하나 얻고, 광평리 192번지에 사시는 김호정(78) 할머니께는 들깨를 하나 얻고, 광평리 194번지의 박만희(75) 할머니에게는 팥을 하나 얻고, 광평리 194-2번지의 장영자(67) 할머니에게는 약콩과 덩굴강낭콩, 장콩을 얻었다.

 

구춘옥 할머니 댁의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쟁기. 예전에는 전부 이걸로 밭을 일궈 농사를 지었지만 이제는 이렇게 먼지만 뽀얗게 앉아 있다. 그래도 어디 버리지 않고 잘 보관하고 계셔서 좋은 걸 볼 수 있었다.

 

 광평리 192번지의 김호정 할머니. 원래는 뭍에서 살다가 제주로 들어왔다고 하신다. 나이가 들면서 몸에 불편한 곳이 많이 생겨 농사는 많이 짓지 않는다고 하신다.

 

 광평리에서 내려오는 길에 있는 마을을 들렀으나,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 대신 금송을 보았다. 태어나서 처음 봤는데 나무의 모양이 참 예뻤다.

 

동백 공원의 산책로. 광평리에서 내려오는 길에 있는 동백 XXXX 공원. 새로 조성한 산책로에 멧돌이 박혀 있어 한 장 찍었다. 어디 민속품 가게에서 한 번에 잔뜩 사다가 박아 놓았나 보다. 우리에게 과거와 전통은 이런 취급을 받고 있지 않는가 생각하게 만든다.

 

 

한참을 내려와 서귀포시 쪽의 군남동에 들렀다. 이곳은 더 말할 것도 없이 감귤나무 천지다. 다른 건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다. 감귤 밭만 신나게 헤매고 다니다가 한 집의 텃밭에 차를 멈췄다. 저쪽 구석에 갓이 자라고 있는 걸 안완식 박사님이 놓치지 않고 발견하셨다. 그렇게 군남동 947번지 구남준(57) 씨의 집에서 적갓 씨를 얻었다. 이건 파란 것보다 맛이 좋고 향이 짙으며 맵다고 한다.

 

 군남동의 적갓. 때깔이 참 좋다.

 

이후 서귀포 쪽으로 내려가 중문 쪽에 숙소를 잡으러 가다가 보니, 마침 오늘이 중문 장날이었다. 장을 한바퀴 돌며 토종이 없나 뒤지고, 안완식 박사 님께 뜨뜻한 개량한복을 한 벌 얻어 입었다. 이거 토종보다 더 큰 수확이다. 참고로 중문 5일장은 3, 8일, 모슬포는 1, 6일, 서귀포는 4, 9일이란다.

오늘의 숙소는 천제모텔에 방을 잡았다. 밤에는 제주 여성농민회의 김정임 선생님에 찾아오셔 그동안의 성과와 결과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마라도와 가파도의 농업 사정은 어떠한지 정보를 들었다. 두 섬은 어업이 주라서 별 건 없을 거라 한다. 오늘은 이렇게 하루가 지났다. 이제 사흘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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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12월 27일. 오랫만에 맑은 날이다. 꼽아보니 제주도에 와서 두 번째 맑은 날이다. 그동안 흐린 날씨에 고생 좀 했는데 오늘은 어떨지 모르겠다.

먼저 화순리 옆에 있는 덕수리부터 조사를 시작했다. 한 집을 들르고, 두 집을 들르고... 왜인지 할머니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것만이 아니라 사람이 있는 집도 거의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헤매고 다니다 가게 앞에 꼬마애들이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어른들은 어디 안 계시냐고.

돌아오는 답에 머리를 쳤다. 어른들은 오늘 화순리에 잔치가 있어서 모두 그곳에 가셨단다. 우리가 화순리에서 왔는데, 이 마을 어른들은 모두 거기로 간 것이다. 이런 정보를 미리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쉽지만 이 마을은 여기서 이만 접기로 했다. 

 

덕수리에서 만난 폭낭(팽나무).  

 

 

다음 마을로 건너갔다. 이번에 들른 곳은 한경면 고산리. 이곳은 밭이 있긴 한데 홑짓기가 주를 이루고 있어 별 것이 없었다. 정말 가까이서 보니 장관이다. 너른 땅에 쭉 똑같은 작물만 자라고 있다. 마늘 아니면 양파.

 

고산리에서 만난 어느 밭. 저 끝까지 모두 마늘이다. 이렇게 농사를 짓기에 농민이 적어도 그 많은 도시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게다. 그러다 보니 생산량이 중요해지는 것이고...

 

 

이 마을에서 바쁘다는 할머니를 한 분 간신히 찾아서 40일깨와 50일깨를 얻었다. 40일깨는 키가 작아 무릎 정도까지 자라고, 50일깨는 그보다 커서 허리까지 자란단다. 그리고 한 창고에서 쪽파를 다듬는 어르신 내외를 만났는데, 토종 이야기를 꺼내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토종은 가져가면 농협에서 수매를 안 해줘요. 그래서 멸종이 되었어요."

그렇다. 토종은 생계와 직결된다. 생계를 완전히 다 책임지진 않아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면 토종이 뿌리를 내리는 일도 쉬워질 것이다. 이건 참 복잡다단한 문제이니 여기서는 그만두겠다.

그리고는 길가의 담장에서 나팔꽃 같은 것을 하나 채집했다.

 

다시 차에 올라 신도리로 향했다. 여기는 바다와 가까운 곳이라 구릉도 없고 길이 평탄하기만 하다. 햇빛도 따땃하고 별다른 변화도 없으니 졸립다. 차에 올라 가만히 있으면 단조롭고 한가하기만 한 시간이다.

신도리를 돌아다녔지만 별 건 없었다. 그러다 한 젊은 농부 한 분을 만났다. 이 분께 토종을 물으니, 제주도 풋마늘이라면서 한 단을 들고 나오신다. 지금 심는 건 30년 이상 되었다고 하니 눈이 번쩍 띄였다. 이건 마늘을 먹는 게 아니라 줄기를 먹는 건데, 알이 작고 잔뿌리가 많으며 가지가 많다고 한다. 그리고 먹었을 때 다른 곳의 것보다 향이 좋다며 제주의 식당에서 나오는 풋마늘은 대부분 신도 1, 3리와 용수리가 주산지라고 한다. 1단에 3700~3800원을 받아 값도 나쁘지 않다고.

7월 말에서 8월 초에 심어 12월 말에서 1월 초에 거두는데, 5월이 되어야 씨가 나오니 지금은 나눠줄 것이 아무것도 없단다. 나중에 그맘때 연락하기로 약속하고 말았다. 풋마늘은 농사짓기는 힘든 편이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겨울에 눈비 맞으며 일해야 하기에 그렇단다.   

 

신도리의 젊은 농부. 이 정도면 아주 아주 젊은 편에 속한다. 농사로 벌어 먹기 힘들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고향과 땅을 지키고 있다. 

 

풋마늘. 농사로 돈을 벌어 살려면 무엇보다 판로가 큰 관건이다. 토종도 그런 쪽으로 고민을 해야 할 시점이 다가온 듯하다.

 

 

신도리를 조금 더 돌다가 신도2리 1317번지에서 양이남(71)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께 갯나물(갓) 빨간 거를 얻으며 들으니, 파란 것보다 이게 더 맵다고 하신다.

다음은 중산간으로 올라갈 차례다. 지금까지 경험한 바에 따르면, 바닷가 근처보다 중산간으로 오를수록 그나마 집에서 조금조금씩 심어 먹는 것이 많았다. 다시 말해 그만큼 토종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기대를 하며 산양리 방향으로 올랐다.  

 

 산양리를 찾아가는 길에 만난 감귤. 감귤 종류가 이렇게 많다는 건 제주에 와서 처음 알았다. 이건 껍질이 두껍고 단맛이 덜해서 그다지 상품성이 없는 것이지만, 길을 다니며 하나씩 까먹으면 참 맛났다.

 

한경면 산양리의 어느 농가 뒷밭의 모습. 제주는 대문만이 아니라 밭에도 이렇게 대문을 만들어 놓았다. 특히 이곳처럼 지대가 높은 곳에서는 마소를 놓아먹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니까 이 대문은 도둑놈을 막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짐승을 막으려고 걸쳐 놓은 것이다.

 

 

산양리에 올라 또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다녔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뭐 훔치러 온 사람이거나, 아니면 땅을 보러 다니는 외지 사람인 줄 알 것이다. 그렇게 돌아다니는데 한 할아버지께서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신다. 인사를 드리고 이야기하다 보니, 이 마을에서 어릴 때부터 사신 토박이셨다. 토종 종자를 찾는다고 말씀드리니 집으로 가보자며 이끄신다. 한경면 산양리 2441번지에 사시는 이경구(80) 어르신이다.

할아버지를 따라나서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여러 개 들었다. 제주의 장이 서는 순서는 이렇다. 제주시에서 애월로, 애월에서 한림으로, 한리에서 고산으로, 고산에서 모슬포까지 갔다가 다시 제주로 간단다. 그리고 쟁기질은 흙이 센 밭은 겨리로 갈지만, 대개는 홑머리로 밭을 갈았다. 돼지는 보통 집집마다 1마리만 키웠다. 그건 다들 아는 똥돼지다. 씨를 뿌리고 발로 밟은 것은 밭이 일어나서 그랬다. 그렇게 발로 밟은 씨는 조와 산듸(밭벼) 두 가지였다. 예전부터 옥수수나 수수 같은  건 심지 않았다고 한다. 그건 아무래도 거름 때문일까?

이런 저런 이야기만 듣고 정작 씨는 얻지 못했다. 아니, 호박 하나를 얻었긴 한데 별로 좋지 않아서 숙소에 있던 것과 바꾸었다. 그것도 같은 제주도 안인 군메오름 근처에서 얻어온 것이란다.

 

다시 차에 타 청수리 방면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감귤 하우스 재배를 하는 분을 만났다. 전문적으로 아주 열심히 농사를짓는 분이었다. 이제 제주도 하우스 감귤이 많아졌다고 한다. 그분 밭에 있는 박을 하나 얻었다. 지난해 서귀포 농사시험장에 견학을 갔다가 얻어온 것이라고 한다. 청수리를 돌았지만 별 건 없어, 서광서리 쪽으로 향했다.

 

서광서리는 뭔가 있을 만한데 다들 감귤에만 집중하고 있어 그런지 정작 돌아보니 토종을 만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집에서 콩을 말리고 있어 주인이 어디에 있는지 한참을 뒤지고 찾았지만 만날 수 없었다. 그래서 감사의 수건 하나를 놓고, 콩을 조금 얻어왔다.

 

서광서리에서 이제 어제 잠을 잤던 숙소 쪽으로 향했다. 여기만 돌면 오늘의 일정은 끝이다. 마지막으로 돌아볼 곳은 구억리라는 곳이다. 대평면 구억리 697번지 주재희(84) 할머니 댁에서 대미를 장식할지 이 순간만 해도 아무도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에는 그 윗집에 들어가 한참을 뒤졌지만 별 게 없어서 그냥 지나칠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특히 텃밭에 자라는 무와 배추가 심상치 않아 보여 실례를 무릅쓰고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한참 사람을 찾는데 마당 한켠에 이런 무가 놓여 있는 게 아닌가!

 

무의 생김생김이 심상치 않았다. 이걸 보자마자 안완식 박사님께 달려가 보고했다.

 

 

다시 돌아오니 할머니께서 나와 계셨다. 이게 뭐하는 놈들인가 신경 안 쓰시는 척하며 유심히 보시는 게 느껴졌다. 그러면서 본인이 하실 일을 차분히 하시는데, 우린 아주 안중에도 없는 듯 행동하신다. 귀찮게 들러붙어서 이것저것 여쭈었다. 저 무는 언제부터 심은 건지? 사다 심은 것인지 아니면 씨를 받아서 심는 것인지? 자꾸 귀찮게 물으니 사람 말을 안 믿는다며 벌컥 화를 내신다. 육지 사람들은 이상하다며, 속고만 산 사람들처럼 꼬치꼬치 캐묻는다고 역정이시다. 하지만 정확히 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이야기를 많이 나누어야 하니 어쩔 수 없다. 

 

자식들 챙겨줄 참깨를 키질하고 계신 조재희 할머니. 어머니의 마음은 언제나 자식들 챙기는 데 가 있는 걸까?  

 

 

그렇게 어렵게 물어 알아낸 것은, 이 무는 6월에 심는데 빨리 하고 늦게 하고의 차이일 뿐 모두 같은 무이다. 크기에 차이가 있는 것은 그 때문일 뿐이다. 그리고 청춘부터 심던 것으로, 정확히는 시집와서부터이니 18살부터다. 씨를 받아서 쓰는데, 약방에서 사온 소독약을 다라에 넣어서 살살 잘 묻혀서 쓴다. 그래야 3년을 두어도 끄떡없어서 그렇게 한다. 그리고 키질하시던 깨는 40일깨로 이것도 젊어서부터 심었다. 텃밭에 있는 배추도 물론 시집와서부터 씨 받아서 계속 심는 것이다. 그래도 무보다는 좀 늦다고 한다.

할머니 성격이 장난이 아니다. 본인도 늑저분한 곳에는 있지 못하신다는데, 집 안 곳곳이 깔끔하다. 이 연세에도 몸을 놀려 집을 치워 놓으신 걸 보면 기가 막힐 뿐이다. 할머니는 나면서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어멍 얼굴도 모르고 자라셨단다. 그런데도 살림 솜씨는 대단하신 듯하다. 어느 정도 지나자 이제 귀찮으신지 "혼저 갑서"라고 외치시며 얼른 내보내신다. 그 등쌀에 쓱 물러나왔지만, 오늘 마지막에 큰 수확을 얻어 다행이다.

 

구억리 할머니의 배추. 그리 통이 많이 차지 않고 길쭉한 것이 토종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땅에 박혀 자라고 있는 단지 무(추정)의 모습. 제주도 무는 왜 다들 이렇게 생겼는지 모르겠다. 같은 씨를 가지고 뭍에서 심으면 어떻게 될까?

 

 

이제 숙소로 돌아가는 길. 추사 김정희가 유배생활을 했다는 대정 성터를 잠시 들렀다. 현재 수리하고 있어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대신 담이 낮아 밖에서 기웃거리면 충분히 볼 수 있다.

 

추사가 이런 일을 했을리는 없고 어디 있는 걸 주워다 놓지 않았을까?

 

추사가 유배생활을 했다는 집의 뒷간. 역시나 돼지가 살고 있다. 저기 돌그릇은 물그릇처럼 놓았지만 원래는 곡식을 다루는 데 쓰던 것일 듯하다. 그냥 대충 가져다 놓은 티가 난다. 

대정 성벽. 이곳은 70년 전 다카하시 노보루가 들렀던 곳이기도 하다. 그 사람도 그때 이곳에서 이 성벽을 보았겠지. 하지만 추사의 유배지는 저렇게 꾸며 놓지 않았을지 모르겠다. 뭐 그때는 주변의 집들이 다 저런 식이여서 뭐가 뭔지 알 수 없었을 게다.

 

 대정 성터에 있는 하루방. 지금의 하루방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좀 더 익살스럽고, 좀 더 몽골인과 닮았다고 할까? 확실히 하루방은 몽골인의 모습에서 온 듯하다. 모자는 아주 몽골 모자와 똑같이 생겼다.

 

 

대정 성터를 잠시 둘러보고는 바로 숙소로 이동했다. 오늘도 어제 잔 화순리의 모텔이다. 대정리에서 화순리로 넘어가는 길에는 삼방산이 있었다. 삼방산은 산이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제주의 몇 안 되는 산이다. 대부분은 오름이라 하여 용암이 불룩하다 식어 산의 모양처럼 솟은 것인데, 이건 암반부터 다르다고 하니 원래 용암이 팍 터지기 전부터 삐죽하니 튀어나와 있던 곳이 아닐까? 아무튼 참 신기하다.

 

화순리로 넘어가는 길에 만난 삼방산. 구름과 하늘이 삼방산과 어우러져 너무 멋있는 모습에 취해서... 

 

 삼방산 자락에 있는 절 앞의 주차장에서 바라본 바다의 모습. 왼편에 저게 용머리라고 했던가? 그 옆에 파랗게 보이는 게 하멜이 표류한 것을 기념하여 만든 배 모양의 무엇이다. 가까이 가보지는 않았다. 어서 돌아가야 하기에.

 

 

삼방산의 웅장한 모습. 불뚝하니 참 잘 생겼다. 

 

 화순리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날이 좋아 재수 좋게 한라산을 볼 수 있었다. 신령스러운 모습이다. 2000m가 이러니 그 이상 되는 산은 얼마나 놀라울까? 저절로 눈물이 주루룩 흐르지 않을까?

 

 

이로써 오늘 하루도 끝났다. 밤에는 안완식 박사님의 지인께서 저녁에 초대하여 배터지게 먹고 재밌게 놀았다. 두 분은 매화를 매개로 귀한 인연을 맺었다고 하는데, 아무튼 이런 회식은 20일 넘게 다니면서 처음이다. 덕분에 참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다음날 그 여파가 미쳐 좀 힐들었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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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26일. 집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시 비행기로 제주에 왔다. 이번 조사에는 안철환 선생님이 합류해 모두 4명이 되었다. 공항에 내려 차를 빌리고, 시내에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으며 시간을 아끼고자 앞으로 어디를 돌지 미리 지도를 통해 둘러보았다.

점심을 먹은 뒤에는 다시 황사평에 단지 무를 찾으러 갔다. 전화 연결이 되는 듯하였으나 갑자기 끊어졌다. 이로써 두 번째 실패. 도대체 언제쯤 만날 수 있는 걸까?

어쩌랴, 할 수 없이 다음으로 미루고 이번 일정 안에만 만나기로 작정하고 길을 나섰다. 오늘은 저 남쪽, 제주시의 반대편에서부터 시작해야 하여 서귀포시 안덕면 화순리로 이동했다.

 

 안덕면으로 가는 길에 만난 햇살. 구름을 뚫고 나오는 모습이 뭔가 앞날에 서광을 비추는듯...

 

 

모텔에 들어서니 이미 날이 어둑해지고 있다. 오늘은 여기서 그만두고 쉬기로 했다. 비행기를 타고 건너온 첫날이기도 하고, 이미 1차에서 열심히 수집한 탓이기도 하다. 근처의 중앙식당을 소개받아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 아침도 이 식당에서 먹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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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24일. 제주도 토종 수집 조사의 1차가 끝나는 날이다. 하늘은 오늘도 흐릿한 편. 햇빛이 그립다. 첫날 숙소에 남겨 놓고 왔던 내복을 다시 찾아 입고 돌아다녔다. 그만큼 제주의 날씨를 얕보았다고 할까?

마지막으로 어음리를 다시 한 번 들렀다. 이곳이야말로 그동안 다녔던 곳 가운데 뭔가 있을 만한 곳. 마지막 날까지 한숨도 돌리지 않고 토종을 찾기 위해 강행군을 했다. 그 결과 산무라는 걸 하나 발견했다.

 

어음리에서 발견한 산무의 꽃. 원래 밑에서 자라던 것이 어떻게 200m 이상 되는 곳까지 올라갔는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이 마을에서는 이걸로 김치를 담가 먹곤 했단다.

 

 

 

그리곤 잠시 비행기 시간을 기다릴 겸 한림공원을 찾았다. 이곳은 고생고생하며 개발한 공원인데, 그저 그렇게 이름만 달고 있는 곳보다는 훨씬 알찬 내용을 담고 있어 재밌었다. 여러 이색적인 식물이 많았는데, 그래도 나에게는 민속촌이 가장 눈길을 끌었다.

 

 

 

장식으로 가져다 놓은 것인지, 아니면 새로 만들어 놓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하루방을 천천히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겨 좋았다. 안완식 박사님은 저쪽에서 또 분주하게 다니시며 자료를 모으시고 있다. 

 

처마를 길게 낼 수 없는 제주 집의 특성 때문에 생긴 처마랄까? 지붕에 올린 짚으로 이렇게 길게 내려면 바람에 날려 제대로 간수할 수 없었을 게다. 그래서 집집마다 이런 식으로 처마를 따로 설치했다. 

 

물허벅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는 사진. 이전에 100살이 가깝다는 할머니 집에서 본 형태가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 물론 제대로 쓰이진 않는 박물관의 흔적일 뿐이지만, 이런 형태로라도 볼 수 있다는 것이 소중하다. 

 

 제주는 따로 아궁이를 만들지 않고 돌을 놓고 거기에 솥을 얹었다. 왜 그럴까? 한참 고민하고 묻곤 했다. 날이 따뜻해서 그런 것도 있겠고, 설명을 들으니 제주의 특성이 빨리빨리 수습해서 도망가야 하던 시절 때문에 이런 형태의 부엌이 나오지 않았겠냐는 말도 있었다. 무엇이 맞는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제주의 삶은 지금 보는 모습과 달리 엄청 척박했음이 틀림없다.

 

 제주의 말방아. 제주는 소 만큼 말이 흔해 말을 잘 부렸다. 농사를 지을 때도 그랬고, 이렇게 방아를 찧을 때도 그랬다. 물론 이런 것은 몽골의 흔적일 테다. 몽골이 고려 때 와서 남겨 놓은 것이 조선이란 사회를 지나면서도 남은 것은 섬이라는 특성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옛 우리말을 연구하는 사람이 제주의 말을 연구하는 것일 테다.

 

 

한림공원을 차분히 구경하고 있는 사이에 제주도 여성 농민회의 김정임 선생님이 찾아왔다.

다시 돌아가기 전에 제주에서 모은 토종 씨앗을 나눠 농민의 손에서 제대로 뿌리내리고 씨를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그래도 유전자원센타에서 지원을 받았으니, 거기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 적당히 씨앗을 남기면서 최대한 제주에서 이 씨앗들이 퍼질 수 있도록 듬뿍듬뿍 퍼서 나누어주었다. 보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양만 남기고, 살아 숨쉬는 대로 제주의 땅에서 제주의 하늘 아래 제주 사람의 손으로 남는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일이 없겠다는 안완식 박사님의 뜻이었다.

이 작업으로 한 시간 넘게 시간을 보내고 서둘러 공항으로 향했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 그리 큰 뜻은 없지만 남들도 다 가족과 함께 지낸다는 하루인 크리스마스이니 우리도 활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뭐, 그래야 하루만 쉬고 다시 제주로 올 테지만, 그 하루 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모른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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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23일, 흐리고 곳에 따라 햇살이 비췄다.

성산봉 옆에서 잤지만 성산봉은 오르지 못하고, 그저 아침을 먹고 밑에서 구경만 하고 출발했다.

 

그 이름난 성산 일출봉. 그냥 밑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길을 떠났다.

 

송당리를 향해 가는 길. 확실히 동부가 서부보다 척박한 듯하다. 일단 사람이 별로 없다. 서부에는 그래도 사람이 꽤 살았는데, 이곳은 사람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사람들도 그나마 바닷가에 모여 산다. 중산간에서 마을을 발견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오늘 찾아가는 송당리는 그나마 동부에 있는 마을이다.

 

송당리로 가는 길. 감자, 당근이 전부인 듯했다. 서부에서 보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에 놀랐다. 

 

황량한 주변 경치를 보며 송당리에 올랐다. 이곳은 꽤 마을이 커서 나름 기대를 하며 동네를 돌기 시작했다. 사람을 찾아 한참을 돌다가 송당리 1389번지의 할머니(82) 댁에 들어갔다. 이 할머니는 이곳에서 나 이곳에서 늙었다. 말씀도 잘하시고 기억도 또릿하셔 옛날 일을 묻고 자료를 얻기에 좋은 분일 듯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목적으로 찾은 것이 아니니 토종에 대해 물었는데, 지금은 별 게 없다고 하신다. 할 수 없이 이 집 건너편 집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이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주변을 살피다 텃밭에서 무를 발견했다. 혹시 단지무?

 

송당리에서 발견하 무. 이게 혹시 단지무는 아닐지 하는 마음에 한참 이 집을 뒤졌다. 

 

 

다시 건너편 할머니 댁으로 가서 이 집주인의 연락처를 알아보았다. 얼마나 간절하게 찾았는지 모른다. 결국 연락처를 알아내 전화 통화를 한 결과, 주변에서 씨를 얻어다 심었다고 한다. 봄에 씨를 받으면 꼭 연락을 하기로 약속하고 이만 떠났다.

마지막으로 송당리의 사무소에 들렀다. 별 소득은 없었지만, 이 사무소 앞에서 재밌는 비석을 발견했다. 내가 번역하는 자료에 당시 제주도 사람들이 일본에 돈을 벌러 갔다는 기록이 많이 나왔다. 그만큼 제주 사람들이 일본에 많이 갔다는 증거다. 그걸 뒷받침하는 비석을 하나 보았다. 물론 여기서만 본 것이 아니라 제주의 곳곳에 이런 비석이 많았다. 예전 양반네들을 위해 비석을 세우듯이 지역 발전을 위해 애쓴 사람을 위해 비석을 세운 것이다. 이것이 어찌 보면 나쁘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내가 사는 고장을 좋아하고 지킨다는 뜻이니 꼭 그렇게 볼 수만은 없겠다. 안산에서도 역사가 깊은 수암에나 이런 비석을 찾아볼 수 있다.

 

 이역만리 일본까지 건너가 힘들게 번 돈으로 고향의 발전을 위해 애썼다는 증표로 세운 비석. 제주에서는 다른 지방과 달리 송덕비니 공덕비 대신 이런 비석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만큼 일본과의 거리가 가까웠다는 것일 수도 있고, 아무튼 제주 사람들의 강인한 생활력을 엿볼 수 있는 하나다.

 

 

송당리를 떠나면서 마지막 집을 들렀다. 멀리서 보기에도 집이 오래되어 보이고, 특히 창고가 그랬다. 그래서 들렀지만 할망에게 곶감만 얻어 먹고, 이제는 다 사다가 심는다는 말만 들었다.

 

올 가을 산에서 새를 베다가 새로 얹었다는 창고 지붕. 민속촌 같은 데서 보는 죽은 모습이 아니라 뭔가 살아 있는 듯하여 좋았다.

 

이후 씨앗을 찾아 돌아다녔지만 아무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제주의 풍속은 실컷 구경할 수 있었다.

아래는 그 풍경의 하나이다.

 

제주 가사리인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저쪽에 보이는 귤나무가 100년도 더 된 나무라는 것을 믿을 수 있겠는가!

열매는 많이 달렸지만 확실히 크기는 별볼일 없었다. 나무도 늙어서 그런가 보다. 

 

 옛날 말방아가 남아 있다고 해야 하나, 옛날 말방아를 굳이 남겨 놓은 곳이라고 해야 하나. 나에게는 그때의 모습을 볼 수 있어 좋은 곳이었지만, 여기에 더이상 방아 찧는 사람들은 없을 테니 죽은 공간이라고 해야 할 곳이겠다. 그래도 이런 흔적이나마 볼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역시나 죽어 있는 공간이라 슬프기만 했다.

 

 

 

 

 

이 집들도 마찬가지였다. 토종을 수집하지 못할 때는 이런 곳에 자주 들렀는데, 들를 때마다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옛날 제주의 똥간에서는 똥은 돼지에게 먹이고 오줌은 따로 모았다. 아래 보이는 거무틔틔한 공간은 똥이 떨어져 똥돼지가 즐기는 공간이고, 나무가 박혀 있는 그곳은 오줌이 닿아 주르륵 흘러 따로 모이는 공간이다.

 

 

 오줌이 주르륵 흘러 모이는 곳이 바로 저곳이다. 제주의 척박한 환경이 만든 재미난, 그렇지만 한이 서릴 법한 곳이다.

 

 

이후 이날 마지막으로 어음리를 다시 찾았다. 그곳에서 단지무를 찾은 결과 이런 무까지 보았다. 옆에 단지와 비교하여 비슷하지 않은가? 그 이후 결과는 단지무가 아니라는 것. 제주의 단지무, 전설로 남았다. 그걸 복원하려면 앞으로도 꽤 많은 나날이 걸리겠다. 뭐든지 그렇지 않을까. 잃어버리는 건 순간이지만 그걸 다시 찾는 건 어마어마한 시간이 걸린다. 잃어버리기 전에 잘 보존하면 좋으련만 사람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그날 마지막으로 어렵게 어렵게 수소문하여 만난 벌거숭이 공화국의 주인장. 산전수전 많이 겪은 듯한 주인의 저녁 대접을 잘 받고 어두운 밤길을 더듬어 숙소에 가 잤다. 이날이 마지막이다. 내일은 제주 전여농 담당자를 만나 우리가 그동안 제주에서 모은 종자를 나누고, 이 씨앗들이 제주에서 널리 퍼지길 바라며 비행기를 탔다. 그 소중한 결과인지 모르겠지만, 제주에서는 토종 씨앗과 관련하여 활발한 사업이 벌어지고 있다. 참 소중하고 귀한 인연이었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 이틀 쉬고 다시 제주로 날아갔다. 그 이야기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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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22일 월요일. 간밤에 비와 함께 눈이 내렸다. 제주에서 눈을 볼 줄이야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이건 상서로운 조짐일 게다. 암, 그럴 것이다. 하지만 바람과는 달리 뉴스에서는 강풍에 주의하라고, 더구나 산간으로 가는 사람들은 체인 없이는 미끄러져 책임질 수 없다고 엄포를 놓으니 시작부터 떨린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든든히 아침을 먹고 출발했다. 오늘은 조천읍을 돌아, 저 성산 쪽까지 달릴 예정이다.

 

바람이 많이 불고 간간이 바닷가에도 눈보라가 휘날려서 그런지 사람들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이거 어디로 가는지, 뭐 하러 가는지 의미도 찾지 못하고 눈보라에 휩쓸려 길 잃은 나그네 꼴이다. 신촌리라는 곳에 도착하여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다고 생각한 순간, 한 집에서 사람이 나오는 걸 보았다. 얼른 가서 사정을 말하는데, 아침 출근길이라 아줌마가 바쁘시다. 아이까지 데려다줘야 한다고 하며 난 모르겠으니 우리집 어머니와 이야기하라며 찬바람 부는 날 찬바람처럼 쌩 가버린다. 야속한 아줌마. 젊으면 저런 걸까? 난 저러지 말아야지. 아무튼 할머니께서도 잠시 마당에 뭘 하러 나오셨는데, 귀가 너무 많이 어두우시다. 아무리 크게 외쳐도 잘 못 알아들으신다. 더구나 예전에 귀가 어두워지셔서 할머니가 하시는 말씀도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본토박이 제주말이다. 허! 허! 웃음만 나온다. 한 나라에 살아도 이렇게 다르구나!

그래도 어찌어찌 손짓발짓 섞어가며 간신히 뜻은 통해 보리콩을 조금 얻었다. 하지만 그나마도 별 시원찮다. 벌레가 다 쪼사 놓은 것이 할머니가 문물에 밀려 찬밥 신세가 된 듯한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는 듯하다. 씁쓸하지만 고마운 마음으로 봉투에 잘 챙겼다.

 

다시 차에 올라 열심히 달렸다. 어째 여기는 감귤밭만 보이고 사람 사는 집은 보이질 않는다.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사전 조사가 중요하다는 걸 느꼈다. 물론 이렇게 뒤지다 남들이 찾지 못한 귀한 걸 발견할 수도 있지만, 시간이 얼마 없는 상황에서는 사전 조사가 무엇보다 중요하겠다.

아무리 달려도 비바람만 거세고 사람은 없고, 선흘리 돗바령이란 곳에 잠시 차를 세웠다. 드넓은 밭에 누가 심었는지 모를 적팥과 수수가, 그나마 저절로 떨어져 자란 것이라 초라하게 몇 그루 남아 있다. 오전 내내 달려도 제대로 된 집을 찾지 못했으니 이거라도 소중하다. 일단 수집. 

다음으로 선흘리 1012번지 사시는 부옥례 할머니를 간신히 만나 육십일깨를 얻었는데, 별로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 물론 기록도 별로 없고, 사진도... 날씨도 궂고 그만큼 힘도 빠져서 그렇다.

 

여기저기 샅샅이 뒤지는 길에 잠시 동백이 우리의 눈길을 잡아끈다. 요즘 한창 동백을 수집하시고 자료를 모아 글을 쓰고 계신 안완식 박사님께서 오줌도 쌀 겸 몸도 풀고 내리자고 하신다. 그러고는 바로 동백 앞으로 달려가셔서 사진을 찍으시고 품평을 하시느라 바쁘시다. 박사님 눈에는 하나만이 아니라 몇 개가 동시에 보이나 보다. 길을 지나며 지나치는 식물 하나도 놓치지 않으신다. 이번 수집을 따라나서며 안완식 박사님의 모습에서 정말 많은 걸 배우고 느낀다.   

 

이런 동백만이 아니라 참 신기한 색의 동백이 많았다. 안완식 박사님 덕에 동백 구경은 눈알이 충혈되도록 잘했다. 

 

 

이럴 때는 잠깐 쉬는 것도 좋다. 때 늦은 점심을 해결하며 잠시 숨을 돌리고, 어제 일을 생각하며 중산간으로 방향을 돌리기로 했다. 물론 일기예보에서는 조심하라고 경고했지만, 혹시 모른다. 괜찮을 수도 있으니 부딪쳐 보기로 했다.

하지만 이게 뭐람! 조천읍은 웬만하면 감귤밭이 전부이고, 중산간쯤 가면 목장뿐이다. 마을이라고 표시된 곳을 찾아도 이제 사람은 거의 살지 않는다. 제주시에 가까워서 그럴까? 다들 시에 모여 살면서 여기는 일만 하러 오나 보다. 보람은 없고 고생만 직싸라게 했다.

 

해발 400m쯤 오르자 바닷가에서는 비바람이 진눈깨비로 바뀌었다. 위로 오르고 오르면서 이거 이대로 올라도 될까? 내가 괜히 천국행으로 이끄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그래도 강화도에서 황청까지 다녀온 몸, 안완식 박사님을 믿으며 갈 수 있는 데까지 올랐다.

 

하지만 오르면 오를수록 눈만 쌓여 있고 사람은 살지 않는다. 대신 목장이 드넓게 자리하고 있다. 결국 한 목장까지 올라가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는 걸 끝까지 확인한 뒤 차를 돌렸다. 만약 확인하지 못했다면 언젠가 다시 가야 할 곳만 남기는 큰 숙제가 되어 머릿속에 맴돌았을 거다. 그런 의미에서는 끝까지 올라갔다가 돌아오길 잘했다. 암~ 목숨을 걸고 다녀오긴 했어도.

 

이대로 돌아봤다 아무 성과가 없겠다고 판단하신 안완식 박사님의 지령으로 단지무를 찾아나섰다. 단지무는 영평이란 곳에 있다고 하여 동부산업도로를 타고 영평동으로 향했다. 한창 도로 확장 공사에 여념이 없었는데, 눈이 내려 그런지 제주 사람들은 이 길로 잘 다니지 않았다. 멋모르는 외지인만 이런 곳으로 다니지 않을까? 

 

 

자 단지무다. 단지무를 찾으러 가는 게다. 영평 하동이란 곳에 안완식 박사님이 이전에 조사해서 찾은 분이 단지무를 심고 있다 한다. 전화통화를 몇 번 시도한 끝에 어떻게 어떻게 연락이 되었는데, 그분이 오늘 장날이라 자신은 집에 늦게 들어온다고 하신다. 이런... 하지만 오늘을 이렇게 끝낼 수 없어 대충 위치만 알려주면 물어물어 찾아보겠다고 했다. 돌아온 대답은 "어려울 텐데..." 하시며 알려주셨다. 대략 그 정보만 가지고 영평동에 뛰어들었다.

 

제주는 밭과 무덤이 함께 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참, 그러고 보니 강화에서도 자주 보았다. 섬이라는 특징인가? 농토가 부족한데 무덤을 쓰려면 이렇게라도 하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영평동에 도착하여 이곳저곳 뒤지다가...

 

 

한참을 뒤지고 뒤지다가 어떤 무밭을 발견했다. 혹시 이곳이? 인간 네비게이션이 되어 지도를 들고 길을 안내하지만 참 난감하다. 표지판도 없고, 그 길이 그 길 같고, 머릿속에 그린 것처럼 나타나지는 않고... 답답하지만 어찌어찌 이 무밭까지 왔으니 일단은 임무를 완수한 셈이다.

허나 이곳을 샅샅이 뒤져본 결과, 안완식 박사님께서는 이 산이 아니라신다.

 

꼼꼼히 단지무를 찾아 돌아보시는 안완식 박사님. 추운 날씨도 그 열정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다.

 

 

단지무를 찾는 일은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겠다. 날씨도 궂으니 오늘은 작전상 후퇴를 외칠 수밖에 없는 상황. 내일을 위해 구좌읍 평미리 사무소로 가 제주도 동부의 농업 현황에 대해 사전 지식을 쌓기로 했다. 해안도로로 내려오니 바람만 심하지 길은 괜찮다. 바람을 가르며 씽씽 달려 구좌읍 평미리 사무소에 도착해, 제주 여성농민회 사무처장 문경숙 선생님을 만났다. 아래는 문경숙 선생님께 들은 이야기...

 

제주 동부에서는 밀감을 하다가 폐원하면서 이제는 거의 없다. 일조량이 부족한 환경 때문에 당도도 안 나오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대신 당근이 전국 생산량의 70%를 차지할 정도로 많이 하며 감자도 많이 한다. 당근은 한그루짓기로 끝인데, 동부 쪽으로 오면 대농이 많아진다고 한다. 그래서 토종 종자가 있으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그리고 중요한 것은 제주의 동쪽이 바람이 더 세다고 한다. 그래서 모래땅이 많다. 조천읍을 돌면서 느낀 것이지만 서부와 달리 사람도 별로 없고 땅도 척박하다고 느꼈는데 그것이 바로 바람 때문이었나 보다. 문경숙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그래서 서쪽에서는 동쪽으로 딸들 시집도 보내지 않는다고 한다. 그만큼 살기가 팍팍하다는 뜻. 그래서 산간에 가도 마을이나 사람이 없다. 어음리가 있던 서부의 중산간과 달리 동부의 산간은 황무지에 가깝다. 그렇다고 수심이 깊은 것도 아니여서 어항도 어판도 별로 형성되지 않았고, 성산이나 가야 겨우 있을 정도다. 한라산을 기준으로 산남과 산북은 일조량에 차이가 너무 크다. 일조량은 물론 바람과 토질, 고기잡이 등 동쪽은 확실히 살기 팍팍하다.

 

한 시간 남짓 이야기를 듣고 성산으로 가서 숙소를 잡고 저녁을 먹었다. 하루 종일 찬바람을 맞았더니 저녁을 먹으며 확 풀어진다. 오늘 묵은 숙소는 아주머니가 아직도 물질을 한단다. 흥미롭긴 하지만 그냥 오늘은 이불 덮고 푹 쉬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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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21일. 날씨가 흐리고 공기가 차갑다. 바람도 좀 분다. 남쪽나라 제주도라고 우습게 봤다가는 안 되겠다. 일단 옷부터 단단히 챙겨 입어야지.

 

8시 40분 어음리에 도착했다. 이곳에 오기 전 봉성리를 지났으나 거기는 별 거 없었다. 봉성리는 다들 큰 읍내로 출퇴근을 하시는가 보다.

 

결국은 찾은 어음리... 어음 2리 3129번지에서 일단 보리콩을 구했다. 뭍과 다르게 보리콩이란, 보리를 거둘 때 거두는 콩인지, 보리를 심을 때 심는 콩인지 잠시 헷갈린다. 뭐였더라???

 

 

 

이렇게 보리콩만 얻고 끝날 줄 알았다. 집이 워낙 정결하고, 뭐 알아볼 수도 없어서 더 그랬다. 하지만 이렇게 끝날 수 없는 곳이란 걸 금방 깨달았다. 집 구석구석에서 발견한 수확의 흔적들... 아래에 보이는 콩가리도 그렇다. 높이 쌓지는 않았지만, 두 분이 사시면서 이런 콩가리를 쌓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할머니에게 더 달라붙어 말을 걸었다. 역시나 할머니에게서는 이것저것 있는 곳이 있으니 가자며 곳간으로 이끄셨다.누가 알았을까? 이곳에서 제주도에서 볼 수 있는 종자의 거의 절반을 다 보았다.

 

 

씨앗을 꺼내 보여주시는 양혜옥(74) 할머니. 평생 농사만 지으신 할머니이신지라 사람이 찾아오는 일도, 사진을 찍는 일도 어색하시기만 하다. 그냥 할머니... 그냥 할머니시다.

그렇다고 할머니만 이런저런 씨앗을 보여주신 건 아니다. 할아버지께서도 낯을 가리지 않고 자기의 농사를 다 보여주셨다.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낯선 사람... 이상한 사람이 찾아와 씨앗을 보여달라고 채근하는 것이라 느낄 만도 한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보여주시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고마운지 이번 일을 통해서 새삼 절실히 깨닫는다.

 

 

계속 농사짓는 씨앗을 꺼내 보여주시는 강형준(74) 할아버지. 늦더라도 꼭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집에 들어오면서 본 오이의 모습도 심상치 않다. 할머니에게 물어보니 이것도 토종이라고 하신다. 물론 꼭 집어 토종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지만, 여름에 더울 때 생채를 해 먹는다며 짤막한 것이 외이고, 길쭉한 것이 오이라며 우리에게 차이를 꼭 집어서 설명해 주신다. 아, 그래도 이렇게 봐서는 아무리 봐도 모르겠는걸 어쩌랴? 일단 사진에 한 방 남겼다.

 

 

다음 더 재밌는 일이 남았다. 이건 제주도를 돌아다니며 내 평생 처음 갔지만 정말 큰 배움이라고 생각하는 한 사건이다.

정말이지 난 이걸 통해 제주도의 반은 다 돌아봤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무엇이냐~. 바로 이 집에서 개발시리를 배운 일이다.

농사짓는 이야기를 하다보니 자연스레 할아버지 할머니가 농사짓는 이야기로 넘어갔고, 곳간에 보관하고 있는 곡식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조 이야기를 했는데, 검은흐린조를 심고 거두어서 먹는다고...

그래서 묻다 보니 답답하다 하시며 씨를 하려고 남긴 이삭을 들고 나오신다.

아~! 그래서 검은흐린조구나! 이게 검은개발시리조구나~!

 

 

시리는 ~처럼, ~같다는 뜻의 우리말이란다. 요즘은 이런 말도 안 쓰고 그런데 안완식 박사님이 넌지시 일러주셨다. 그러면 개발 닮은 조라는 뜻이라고 풀 수 있지 않을까? 정말 개발이다. 개발 닮았다. 우리네 조상은 풀이름을 그 생김이나 특성을 닮은 한마디로 지었다는 것이 새삼 생각난다. 뭐 다른 나라도 그렇겠지만...

 

 

 어음리에서 만난 토종 농가. 결국은 맛과 습관으로 계속 토종 농사를 짓는다는 말을 들었다.

 

 

 

제주도에서 이렇게 많은 토종으로 농사짓는 집을 만나 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농사지으시는 모습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씨앗을 받아 놓으신 거며, 농기구며, 집짐승으로 보면 정말 제대로 찾아온 듯하다. 어디를 가서 이렇게 좋은 분을 만날지 모르겠다.

여기서 그동안 보지도 못했던 대파니, 산두(밭벼)의 메벼와 찰벼니, 두줄보리(맥주보리), 메밀, 들깨, 시불콩(세벌콩) 두 가지, 백편두, 제비콩을 얻었다.

 

 

 

 

오늘은 씨를 조사하고 얻는 것을 그쳤지만, 앞으로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농사짓는 법을 하나하나 꼼꼼히 듣고 싶다. 그날이 올까? 굳이 내가 아니여도 좋은데... 꼭 다시 찾아가 뵙고 싶다.

 

 

다음 집을 찾으러 나가다 배추를 씻는 아주머니가 계신 걸 보고 차에서 내려 언제나 그렇듯 반갑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마침 아저씨도 계셔 슥 나오셔서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기네 집에 아쉽게 토종은 없으니, 혹시 모르니까 저쪽 할머니 집으로 가보자며 우리를 이끄신다. 오고 보니 아까 바로 그 집 바로 밑에 집이다.

이곳은 어음리 3039번지 이문자(84) 할머니 댁이다. 이제 홀로 집을 지키고 계신 듯하셨는데, 집 안은 깔끔하지만 집 밖은 미처 손이 다 가지 못한 느낌이다. 

 

이문자 할머니. 얼굴과 달리 고운 손을 보며 젊으셨을 땐 참 곱지 않으셨을까 생각했다. 

 

 

할머니는 시집 와서 계속 심었다는 고추를 꺼내 보여주셨다. 크기가 무척 작다. 이제와서 고추를 보니 맵지는 않을까 궁금하다. 더운 나라 고추일수록 크기가 작던데 크기는 작으면서 무지 매울 걸 보면 매운 정도가 응축이라도 되는 걸까? 할머니는 고추를 음력 3월이면 심는다고 하신다. 나는 씨로 심으면서 곡우 무렵에 심으니 그럼 음력 5월쯤일 텐데, 따뜻한 곳이어서 그런지 빠르긴 참 빠르다.

 

할머니는 이곳에서 오래사신 만큼 집 안에도 오래된 물건들이 꽤 눈에 띄었다. 그 가운데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화로다. 변택호라고 써 놓은 화로는 내 기억 속의 그것과 달리 옹기 종류였다. 겉에는 페인트를 칠한 것인지, 아님 제주의 옹기가 원래 이런 색인 것인지 참 오묘했다. 아직도 불을 담아 쓰셔서 그런지 반질반질하게 보존상태가 참 좋다. 뭐든지 사람 손을 타지 않으면 뽀얗게 먼지가 앉다가 스러져 사라지는 법.

 

예전에 제주 허벅 전시회에 갔을 때 느꼈던 제주 특유의 옹기가 생각났다. 제주는 흙이 달라 그런지 옹기도 참 별나다. 

 

 

이제 어음리를 뜰 시간이 왔다. 또 다른 곳에 있을 토종을 만나러 가야 한다. 안완식 박사님은 못내 아쉬우신지 나중이라도 여기를 꼭 다시 한 번 들르고 싶다고 하신다. 박사님의 그 바람을 일단 뒤로하고 새로운 곳을 찾아나섰다. 아니 근데 나가다 보니 나중에 또 오더라도 이곳은 한 번 들러야겠다는 곳이 보였다. 다시 차에서 내려 그 집으로 찾아들어갔다.

 

어음리 2963번지 부창(70) 할아버지 댁. 더 많은 걸 기대했으나 할아버지께서 알고 계신 것만 꺼내서 보여주었다. 검은콩(쥐눈이콩)은 보통 것보다 크고 눈도 검다. 올해는 드물게 심었는데, 아무튼 많이 달린다고 하신다. 밥에 섞어 먹기도 하고, 그냥 갈아 콩국도 먹고 하는데, 콩나물은 안 된다. 6~7월쯤 늦게 심어도 빨리 익어서 좋다고 한다. 그 다음 백천이란 콩이다. 주남에 있던 것인데, 이건 그렇게 많지 않다. 이걸로 콩나물을 길러 먹는단다. 마지막으로 열 몇 살 때부터 심던 줄콩까지 얻었다.

 

부창 할아버지 댁의 맞은편 집. 형식은 제주의 옛날 집인데, 사람은 살지 않았다. 농막 정도로 쓰고 있었는데, 태극기를 꽂아 놓은 모습이 신기해 한 장 찍었다. 제주의 아픈 역사를 반영하는 것일까?

 

 

이제는 진짜 어음리를 떴다. 토종이 엄청났던 그 집. 아마 지금까지 제주도에서 최고가 아닐까 한다. 역시 두 내외분이 함께 농사를 지으시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남자나 여자 혼자 살면 그렇게까지 가지고 있기 어렵다는 걸 새삼 느꼈다.

 

다음으로 찾은 동네는 애월읍 납읍리라는 곳이다. 요즘 제주 올레길 걷는 것이 사람들에게 유행이라고 한다. 우리는 그 올레길을 제대로된 동네 골목길을 참 많이도 걸었다.

 

옛 올레. 사실 제주에서도 이제 이런 곳은 흔하지 않다. 차가 드나들기 좋게 시멘트로 바른 길이 더 많고 이런 길은 어쩌다 마주칠 뿐이다. 이 골목에 들어섰을 때의 느낌이 아직도 떠오른다. 좁고 긴 구불거리는 골목, 그 옆으로 늘어선 낮은 담장. 이 길의 반대편에 있던 막다른 집에 차를 몰고 다니는 사람이 살았다면 이 길은 사라졌을 게다.

 

 

그 올레의 한쪽에 있는 집에 들어갔다. 할머니가 얼마나 마당을 예쁘게 가꾸셨는지 모른다. 문 앞에 다가가 조심스레 사람을 찾으니 한 아주머니께서 나오신다. 이야기를 들으니 원래 이 집 주인은 방 안에 계신 할머니인데, 이제 나이가 많으셔서 거동이 편하지 않으시단다. 그도 그럴 것이 할머니가 100세나 되셨다고 한다. 대신 아주머니께 양해를 구하고 집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양계생(96) 할머니만큼 나이를 먹었을 집. 자식들은 다 뭍으로 나가 살고 할머니 혼자 집을 지키고 계셨다. 할머니마저 이곳을 떠나시면 집도 스러질 날이 오겠다. 앞에 분홍색 바가지를 올려놓은 곳이 물구덕에 물을 길어와 등에 져 나른 뒤 올려 놓는 곳이다. 땅에 내려놓다가 깨질 우려도 있고 힘도 더 드니 이런 구조가 나오지 않았을까 한다. 이곳을 물팡이라고 한다. 그리고 부엌에는 큰 물항아리를 두고 일상용수로 썼다.

 

언뜻 보기에도 여기저기 씨앗이 널려 있었다. 당뇨에 달여 먹으면 좋다고 하는 염주, 강낭 또는 태주부루기라고 불렀다는 옥수수, 차나룩(찰벼)이라 부르는 산디, 강낭깨라는 제주식 이름의 해바라기, 보리, 결명자 씨앗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세한 내력이나 설명은 할머니께서 방 안에 누워계셔 듣지 못했다. 그건 아쉽지만 할 수 없다. 그렇다고 방 안으로 남자 셋이 불쑥 들어가 휘저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몸조리 잘하시라 밖에서 이야기만 드리고 집을 나왔다.

 

다음으로 간 집은 납읍리 1825번지의 양찬기(81) 할아버지 댁이다. 이 집에 오기 전 바로 앞집을 들렀는데 사람이 없었다. 그 집도 참 오래되어 보이는 번듯한 집이었다. 대문 바로 옆에 창고에 옛 물건들이 한가득 쌓여 있어 들어가 보지는 못하고 사진만 한 장 찍었다.

 

멍석이 엄청 많은 걸 보니 농사 규모가 꽤 크지 않았을까 짐작만 해 보았다. 천장에는 쟁기도 보인다. 꺼내 내려놓고 싶었지만 이것도 주인이 계시지 않아 구경만 하고 말았다.

 

 

아무튼 그래서 찾은 집이 양찬기 할아버지 댁이다. 안완식 박사님께서는 이곳에 와서도 예의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셨다. "혹시 옛날부터 심던 배추 없어요?" 아니 그랬더니 여기서도 그게 있다며 따라오라신다. 할아버지를 따라 광으로 들어가니 선반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할아버지께서는 얼마 전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이제 홀로 남으셨다고 하신다. 그래서 씨앗은 자기 소관이 아니라 뭐가 어디 있는지 잘 모르지만, 할머니가 보통 이 부근에 씨를 놓고 썼다며 뒤적이신다. 안타깝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대가 끊길지 모를 씨앗을 가져가 보존하고 퍼트릴 테니 다행이다.

이 배추는 옛날에는 국도 끓여 먹고 김장도 해 먹던 것이란다. 100년쯤 됐을 것이라 기억하시는데, 자기 할아버지 때부터 심었던 기억이 난다고 그러셨다. 그러면서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심었을지도 모른다고 하시는데, 그건 정확하지 않으니 일단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온 것으로 기록. 그것 말고 시금치와 무 씨앗도 얻었다. 사람은 가도 씨앗은 남았다. 이 씨앗도 지금에서 시간이 더 가면 사라지겠지만, 오늘은 우리가 가져가 보존할 수 있을 게다.

 

양찬기 할아버지 댁의 광에 있는 곳. 할머니가 살아 계셨으면 이곳에서 이런저런 씨앗이 많이도 나왔을 텐데...

 

 

이제 차를 타고 납읍리를 떠나 상가리로 향했다. 상가리에 들어서니 커다란 폭낭 한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제주도에서도 보호수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었다. 한참 뒤로 물러나 찍었는데도 카메라에 다 담기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나무다. 이 나이의 나이는 놀라지 마시라. 무려 1000살을 추정하고 있단다. 1000살. 이 어마어마한 시간을 한자리에서 보냈다니!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 자체로 신이라 할 수밖에... 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나무가 1000년을...

 

 

 

이 나무를 감상하고 앉아 있을 시간은 없어 사진에만 담고 동네를 돌기 시작했다. 이곳 1768번지 김창생(80) 할아버지 댁에 들어가 호박 하나를 얻고, 그 집 골목에 있던 피마자의 씨를 채집하고, 돌고 돌았으나 별 다른 것은 더 없었다. 상가리에서는 나무 구경 하나 잘했다. 1000년.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는지...

 

상가리에서 장전리로 가는 길에 허름한 집에 들렀다. 할머니께서 마침 어딜 다녀오셔 만날 수 있었다. 보관하고 계신 많은 씨를 보여주셨는데 특이한 것은 없어 수집하지는 않았다. 이곳을 나와 거문덕이라는 곳에 올라가다 피마자 하나를 수집했을 뿐.

 

 

상가리를 떠나 장전리로 접어들었다. 꾸물거리던 날씨는 부슬비로 바뀌었다. 날씨도 꾸물거리고 어음리 이후에는 마땅한 곳도 없고 지친다. 일단 차를 세우고 오줌이나 싸면서 쉬려고 내렸다. 그런데 밭에 무가 자라고 있는데, 이게 또 심상치 않은 것인가 보다. 안완식 박사님이 얼른 이 무밭 주인이 누구인지 주변 좀 수소문해 보라고 하신다. 박사님께서 기다리던 것을 만났나 보다.

 

 심상치 않은 크기의 무. 옛날 제주의 단지무라는 것이 있었다. 오강단지처럼 짧고 불룩한 생김인데, 제주 사람은 그걸 먹었단다. 지금은 사라져 복원작업을 하고 있는데, 이렇게 다니다 그걸 만나면 그 복원작업을 한결 손쉽고 빠르게 해결할 수 있을 게다.

 

그렇게 찾은 집이 장전리 전 이장을 하셨던 양성진 아저씨의 집이다. 농진청에도 몇 번 오간 적이 있다며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신다. 커피까지 한 잔 얻어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직접 수소문해 주셨다. 장전 197번지에 사는 강창하란 사람을 찾으라고, 어떻게 가야 하는지 일러주셨다.

인사를 드리고 나와서 찾아갔는데, 길을 잘못 들어섰다. 인간 네비게이션의 실수. 그래서 유수암리라는 곳까지 올라갈 뻔했다. 유수암리는 이따 들르려고 계획하고 있었는데 왜 벌써 왔을까나. 다시 내려가 처음부터 짚어 나갔다.

근사하게 지은 양옥집을 가지신 강창하 씨 댁에 도착해 말씀드리니, 단지무는 아니고 장에서 사다가 심은 것인데 남은 씨가 감귤밭에 있다며 함께 가자신다. 감귤밭에 도착해 씨를 찾아오시는 동안 피마자와 들깨 씨를 채집했다. 이 들깨는 키가 2~2.5m는 되는 것이 뭘 먹고 이리 큰지 모르겠다. 율무도 있길래 얼른 씨를 챙겼다.

남은 무 씨를 들고 나오셨는데, 영광무라는 종류였다. 영광무... 이후 일정에서 자꾸 만날 이름인지 이때는 몰랐다. 이 무가 사진에 있는 것보다 더 불룩해져서 자꾸 우리를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장전리에서 볼일을 다 마치고, 아까 가려고 했던 유수암리로 향했다. 부슬비는 계속 내리고 사기는 떨어지고 해가 넘어갈 시간도 다가오고... 이제 오늘도 얼마 남지 않았다.

유수암리는 생각보다 작은 동네였다. 중산간이라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사람은 별로 살지 않았다. 그나마 감귤이 집하장이 많아 더 그랬을지 모른다. 이곳에는 제주에서는 흔하지 않은 샘이 콸콸 나오는 곳이었다. 날이 을씨년스러워 그런가 맑은 날 보면 예쁘고 시원했을 샘이, 시커멓고 속을 알 수 없는 것이 무섭다. 물은 참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뭐든 다 그렇지만 물이 성을 낼 때 보면 엄청 무섭다.

유수암리에서는 1939번지에서 강인자(67) 할머니를 만나 집 앞에 아무렇게나 자라고 있던 수수와 꼭두서니를 얻었다. 이것 말고는 다른 건 다 사다 먹거나 심는다고 하신다. 이 일대만 해도 감귤이 많아서 그런가 보다.

 

이후 소길리로 갔다가 더 이상 다니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시고 차를 돌렸다. 소길리에 가서도 별 게 없었다. 비만 내리고... 해안 쪽으로 내려가 숙소를 잡고 하루를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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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에서 만난 이웃

 

 

2008년 11월 28일 아침 7시, 코로 들어오는 공기가 차다. 하지만 영하로 떨어지진 않았으니 그럭저럭 시간이 지나면 따뜻해질 것이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준비하고 길을 나섰다.

9시 30분쯤 드디어 일행을 모두 만났다. 이번 출장에는 안완식, 박문웅, 안철환 선생님이 함께했다.

명동의 중앙우체국에 들러 일을 보고, 수첩이며 필기도구를 사러 명동 한복판을 뒤졌다. 이건 뭐 환율이 급등하면서 찾아오는 관광객을 상대하는 가게만 보이지 문방구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헤매다 마침내 찾은 것이 "Kosney"라는 곳. 그런데 이곳은 뭐가 그리도 비싼지 수첩 몇 개와 필기도구를 사니 8만 원이 넘는 돈이 들었다. 그래도 어쩌랴, 어디에서 또 문방구를 만날지도 모르고 그냥 11시 30분 강화도로 향했다.

가는 길에 김포의 연호정이란 칼국수 집에서 점심을 먹고, 드디어 13시 50분 강화대교를 건너 강화도에 이르렀다.

 

강화대교를 건너자마자 오른쪽에 난 해안도로로 방향을 틀어 용정리 쪽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도착한 범우리라는 마을. 여기서 조사의 가장 처음으로 강화군 강화읍 용정리에서 7대째 살고 계신 최대식(77), 심옥순(75) 어르신을 만났다. 우리의 농촌 어디나 그렇듯 만날 수 있는 건 거의 노인뿐이다. 어쩌다 40~50대의 젊은 사람(?)을 만날 수는 있어도 아이를 만나기란 무척 어렵다. 이제 한 10년 남은 것일까? 노인들마저 자리를 비우면 농촌은 텅 빈 공간이 될 것이다. 그 공간에서 살던 사람이 사라지면 그만큼 그들이 누리고 전하던 우리의 뿌리도 함께 사라질 것이다. 문화는 오랜 세월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일구며 쌓아온 삶의 방식이다. 가깝게는 몇 년 전, 멀게는 몇 백, 몇 천 년 전의 삶과 노래, 노동, 이야기 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런 우리의 문화가 사라지는 날 우리는 어디에 뿌리를 내릴 것인가?

새로운 도구와 문물은 새로운 문화를 몰고 왔다. 모두 그에 압도되었고, 그를 추종하며 맹신했다. 그 결과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노마디즘', 다른 말로 광고 문구를 따르자면 '디지털 유목민'이다. 이걸 까뒤집어 보면 무엇인가? 뿌리 없는 부평초 인생과 무엇이 다른가! 그러나 그것이 몰고온 결과가 모두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정보를 얻고 나누기 쉬워지고, 사회적 약자에게 좋은 효과도 가져오고, 획일과 통일이 아닌 개개인의 다양함과 개성을 표현하는 마당을 마련하기도 했다. 모든 것에는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법이 아닌가. 도구와 문물을 탓하기 전에 그를 활용하는 사람을 탓할 노릇이다. 사람, 그 사람의 마음, 생각 들이 우리의 사회와 문화를 몰고간다.

 

최대식 할아버지는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자라고 늙은, 말 그대로 촌로다. 그 얼굴의 주름에, 두텁고 메마르며 거친 그 손에 강화도 용정리 범우리 마을의 시간과 공간, 역사와 문화가 스며 있다.

최대식 할아버지. 대문간 옆의 광과 농기구 앞에 서서. 청테이프로 붙인 키는 10년쯤 쓴다고 한다.

 

토종 조사를 설명하고 요청하니 심옥순 할머니가 대문 옆에 있는 곳간 문을 따고 하나씩 꺼내 보여준다. 이제는 옛날과 달리 시장에서 사다가 심는 것이 많지만, 그래도 몇 가지는 맛과 같은 이유로 그 씨를 밑지지 계속 받아서 쓴다고 한다.

 

마당질을 끝낸 콩대와 참깨대를 짚으로 묶어 잘 쌓아두었다. 강화와 교동의 농가에서는 대부분 짚으로 부산물을 잘 묶어 놓았다.

 

 

집 앞에는 텃밭이 있고, 그 너머로는 바다가 펼쳐져 있다. 옛날에는 거기에서 팔뚝만한 고기도 많이 잡았단다. 아직도 집에는 투망 같은 고기잡이 도구가 있어 지금도 쓰냐고 물으니, 아들이 오면 한 번씩 가서 잡는다고 한다. 그 큰아들이 군대 갈 무렵인 30년 전까지는 고기가 넘치도록 많았으나, 이후 농약을 많이 치고 그러면서 확 줄었다고 회상하신다.

 

다음 집을 찾아 나섰다. 얕으막한 고개를 넘으니 바로 새말로 이어졌다. 새말은 말 그대로 새로운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 마을의 어느 농가에서 나무에 호박꼬지를 걸어 말리는 모습을 보았다. 이곳이 강화군 강화읍 용정리 새말에 사시는 안인분(73) 할머니의 집이다. 안인분 할머니는 새말을 "샛말"이라고 부르셨다. 아마 발음과 뜻 구분의 편의 때문에 사이시옷 현상이 일어났나 보다. 다니며 보니 이런 일은 어디에나 무척 많았다. 사투리를 연구하는 국어학자는 참 머리 아프겠다. 한 명 한 명 만나서 하나하나 발음을 다 듣고 분류하고 정리하려면... 토종 조사를 나온 안완식 선생님은 그런 맥락에서 참 대단하시다. 이제는 씨앗만 보면 이것이 토종인지 아닌지 가늠하신다. 어떻게 이런 경지까지 오르셨는지 놀랍다.

 나무에 호박꼬지를 걸어 말리는 모습.

 

안인분 할머니는 농사를 많이 짓지는 않는다고 하셨는데, 씨앗을 잘 모아두셨다. 할머니만의 공간에 가서 이것저것 구경했다. 첫 번째 집에서도 그렇고 여기서도 그렇고, 할머니만 아는 할머니만의 공간에 가면 꼭 뭐라도 하나씩 있다.

 

안인분 할머니 댁의 돌절구. 강화와 교동도에는 돌절구가 거의 집집마다 하나씩 있다. 지금은 쓰지 않지만... 

 

안인분 할머니의 뿔시금치. 요즘 시금치는 둥글고 맛대가리 없지만, 옛날 것은 씨가 뾰족하게 뿔이 있어 다루기 어렵지만 아주 맛나다고 하신다. 

 

동네의 어느 집 텃밭에 자라고 있는 파. 조선파라고 하시며 보여주신 것 모두 시장에 나온 파보다 키가 작고 색이 옅었다. 아, 정말 난 아무것도 모르고 맛도 모른 채 아무거나 주워 먹고 살았구나.

 

 

안인분 할머니의 집은 좋은 목재로 지은 집이다. 한때 한옥에 휘어진 목재를 쓴 것이 자연친화적인 모습이 반영된 것이란 착각을 한 적이 있다. 나중에서야 그건 제대로 된 목재를 쓸 수 없기에 그런 것임을 알았다. 이 집은 수원에서도 와서 취재해 갔다며, 요즘 시세로 이렇게 짓자면 5억은 든다고 하신다. 집의 틀이며 모양을 보면 그 말이 거짓이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든다.

반듯반듯한 목재로 잘 지은 집 

 

 

이후 같은 마을에서 3대째 살고 계신 강천희(66) 할아버지와 안병균 할아버지를 만났다. 강천희란 분은 할아버지란 말을 붙이기가 송구스러울 정도로 살갗도 팽팽하고 젊어 보이신다. 이제 우리도 확실히 오래사는 나라다. 어느 새 환갑 잔치는 슬며시 사라지고 고희나 되어야 잔치 좀 한다. 두 분 모두 집도 새로 깔끔하게 짓고 사시는 모습에서 여유가 느껴진다. 

이후 사람을 찾아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다가 아무도 없는 빈 집에서 평상 겸 연장통으로 쓰는 재미난 걸 보고 살짝 사진에 담아왔다.

 

 

수집 조사 첫날. 정신없이 시간이 흘렀다. 일머리도 모르고, 어떻게 정리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기록도 부실하고, 사진도 별로 없다. 물론 시간이 없기도 했다. 음력 11월, 5시면 해는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간다. 해가 넘어갈 무렵이면 빛과 따스함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도 사라진다. 서둘러 밖의 일을 정리하고 집 안으로 들어가 다가오는 밤을 기다린다. 낮밤을 가리지 않는 도시인만 도깨비처럼 거리로 쏟아져 나와 활개칠 뿐. 왜 올빼미족도 있지 않은가? 밤은 달과 함께 공진하는 감성의 시간. 작은 자극에도 피부는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래서 예술을 하는 사람은 밤을 사랑하지 않는가! 하지만 땀 흘리는 사람의 밤은 이튿날의 기운을 챙기는 기다림의 시간. 농촌의 밤은 바로 그런 기다림의 시간이다. 심지어 창밖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마저도.

 

이후 두 곳의 농가를 더 방문하고, 강화읍 인삼센터 앞의 풍물시장에서 할머니 네 분에게 콩 종류를 샀다. 뭔가 차이가 있으니 수집하셨을 텐데, 솔직히 난 아직 아무리 들여다봐도 잘 모르겠다. 이것이 바로 경험과 공부의 차이다! 열심히 좇아다니며 부지런히 배워야지.

 

 

마지막 농가에서 수집 조사를 하는데, 기러기 떼가 날아갔다. 한강 하구 쪽으로 오면서 보니 기러기가 참 많았다. 그러고 보니 가까이에서 기러기를 본 것도 처음이 아닌가. 저들은 무엇을 좇아 대열을 지어 하늘을 날아다닐까? 아래로 양능들(陽陵坪)을 두고 날아오른 기러기. 평坪은 우리말의 들이나 벌을 한자로 옮긴 말이다. 지금도 땅이름에 보면 평이란 말이 많다. 평坪이 아닌 평平이 많은데, 혹시 평坪을 잘못 적은 것이 아닐까? 

 

17시 30분 첫날의 조사를 마치고 숙소를 잡은 뒤 저녁을 먹고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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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를 보며 찾은 곳은 한림읍 명월리. 마을회관 앞에 차를 세우고는 또 동네 조사에 들어갔다. 마을회관 바로 앞에 있는 집에서 한 할망을 만났으나, 뭍에 살다가 섬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며 자신의 집에는 토종이 없단다. 집에 들어오는 길에도 시멘트를 깔끔히 발라 놓으신 걸 보니 그렇기도 하겠다.

그렇다고 아무 성과도 없이 이 동네를 뜨기가 뭐하여 다시 이 집 저 집 기웃거렸다. 돌담을 따라 들어선 골목에서 검은 동부가 자라다 말라비틀어진 것을 발견했다. 다시 한 번 채집에 들어갔다. 검은 동부를 한참 따다 보니 이건 동부만 있는 게 아니다. 새팥으로 의심되는 것과 돌동부도 자라고 있었다. 오늘은 특별한 성과도 없으니 이것 모두 채집 대상이 되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돌담을 따라 집으로도 찾아들어갔다. 마당에 서서 사람을 찾으니 문이 왈칵 열린다. 할머니께서 쪽파를 다듬어 장에 내려고 일하고 계셨다.

 

 한림읍 명월리 양귀순(80) 할머니의 쪽파밭 한 귀퉁이에 있는 바위에 캐다 만 고구마와 골갱이가 놓여 있다. 제주에서는 호미를 골갱이라 부르고, 낫을 호미라 한다. 골갱이는 골을 파는 괭이라는 뜻이 아닐까? 돌이 많은 제주의 밭에서 귀가 넓은 호미를 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할머니께 토종을 찾으러 다닌다고 바쁘시더라도 잠깐 씨앗 좀 보여주실 수 없냐고 부탁드렸다. 흙 묻은 손을 탁탁 털며 일어나시더니 굽은 허리로 우리를 창고로 이끄신다. 이것저것 꺼내서 주셨는데 오래 묵어 못 쓰는 것이 많았다. 이제 기력도 딸리시고 농사일도 많아 세심하게 챙기시기 어려우신가 보다. 하루방도 없는 듯한데 혼자서 고생이 많으신 듯하여 마음이 짠하다. 동네 할머니한테 빌어 왔다는 3년 심은 청상추를 하나 얻은 뒤 이거라도 먹으라고 주시는 곶감으로 허기를 달래며 헤어졌다.

 

꽁꽁 싸매 놓은 씨앗을 꺼내고 계신 양귀순 할머니. 소쿠리에 담겨 있는 곶감은 잠시 뒤 우리의 입속으로 낼름 들어갔다. 

 

 

다시 차에 올라 명월리의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가는 길에 채집하는 일을 잊지 않고 새콩과 나물콩을 챙겼다. 제주에서는 눈에 띄면 일단 모은다. 토종을 찾기가 강화도보다 어렵다. 땅은 넓지만 사람도 마을도 드물고, 게다가 자연조건 탓인지 씨앗도 잘 챙겨 두지 않으셔서 더 그렇다.

 

 여기저기 헤매다 만나 나무에 달린 열매. 뭐라고 일러주셨건만 또 까먹어 버렸다. 열매가 너무 예뻐서 한 장 찍었는데... 

 

 

명월리 상동이란 곳에 사시는 고지옥(76) 할망을 찾은 건 해가 기울어가는 때였다. 이제 오늘 하루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할망은 안 그래도 저녁을 준비하시는 듯하다. 잠시 다른 데 정신 팔려 늦게 온 사이에 안완식 박사님이 고추며 방아풀 씨를 얻으셨다. 고추는 계속 받아서 심고 있다고 하시는데, 정말 작다.

 

고지옥 할머니 댁의 고추. 크기가 아주 작고, 작은 대신인지 아주 맵다. 입에서 불이 날 정도로. 그나저나 12월 말에 이런 고추를 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고지옥 할머니. 어두워지고 있던 때라 사진도 어둡기만 하다. 우리가 느끼기에는 별로 춥지 않았으나, 연세도 있으시고 하여 추위를 막으려고 두텁게 입으셨다.

 

보틀브러쉬나무의 꽃. 우리말로는 그대로 병솔나무란다. 이건 하도 특이해서 까먹지 않았다.

 

 

잠시도 지체할 틈 없이 다시 상명리로 날아갔다. 시간이 천금이다. 상명리 872번지에 사시는 강순옥(71) 할머니 댁에서 기름 짜 먹는 유채와 속이 안 차고 국거리나 김치로 먹는다는 호배추를 얻었다. 할머니는 낮잠을 주무셨는지 한참을 불러서 만날 수 있었다. 끈덕지고 큰 소리로 부르지 않았으면 못 만날 뻔했다. 생판 모르는 사람과 만나야 하느니 만큼 일단 뻔뻔해야 한다. 또 친근하게 다가가야 한다.

 

강순옥 할머니의 옆집에는 양공표, 조유선 어르신이 사신다. 양공표는 강순옥 할머니의 남편의 동생이라고 하신다. 강순옥 할머니 댁에 들어가며 두 집 문패의 이름이 비슷해 혹시나 하고 물었더니 역시나 형제 사이란다.  

 

 강순옥 할머니 댁에서 만난 의자. 무릎이 안 좋아서 이걸 허리에 차고 밭에 철푸덕 퍼질러 앉아서 일하신다. 안에는 스티로폼이 들었다.

 

 

상명리는 오늘의 최종 목적지다. 다른 데를 가고 싶어도 이제 해가 지기에 그럴 수도 없다. 마지막 힘을 내 이 동네를 샅샅이 뒤진다. 그렇게 1771번지에 사시는 강계춘(77) 할망 댁에 들어갔다.

강계춘 할머니 댁 마당 한켠에 쌓여 있는 짚가리. 이걸 소를 먹인다고 한다. 

 

 

해질녘에 만나는 분들은 늘 그렇듯 일단 마음의 문을 좀 닫고 계신다. 날씨에 따라서도 그렇지만 시간에 따라서도 사람을 반기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하긴 한밤중에 누가 찾아오면 나라도 문부터 닫아 걸겠다. 그것이 인지상정. 할머니께 여기까지 찾아온 사정을 말씀드리고 옛날부터 심던 씨앗이 있냐고 여쭈었다. 그러니 보리콩이 하나 나왔다. 여타의 것은 더 묻지 않고 이 정도로 마치고 나왔다. 나와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동네를 더 둘러보다가 담벼락에서 지름콩(콩나물콩)을 찾았다. 콩을 털고 쌓아 놓은 콩가리에서 떨어진 것들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다시 한 번 채집 활동에 들어갔다.

 

오늘 하루는 채집의 연속. 

 

이것으로 오늘의 일을 마치고 대정여성농민회의 김정임 선생님을 기다렸다. 오늘은 잠깐 만나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삼십 분 뒤에 만나 한림읍으로 나갔다. 숙소를 잡기 전 저녁을 먹으며 그동안 지나온 사정과 수집한 토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주도에서는 원래 푸른콩으로 장을 담그고, 노란콩은 소를 먹였다고 한다.

대문에 걸쳐 놓는 나무는 정낭이라고 하는데, 쭉쭉 뻗은 숫대나무(편백)나 삼나무로 만든다고 한다. 이걸 세 개 다 걸쳐 놓으면 멀리 갔다는 뜻이고, 셋 다 내려놓으면 집에 있음, 하나만 내려 놓으면 옆집이나 근처에 있으니 좀 기다리든가 하라는 뜻, 두 개만 내려놓으면 마을 어딘가에 있으니 찾아오든지 하라는 뜻이란다. 도둑이 생겨도 목숨 걸고 섬을 빠져나가지 않는 이상 어디서든 잡을 수 있을 테니 이렇게 경계가 허술(?)했겠지. 요즘처럼 몇 개씩 보안장치를 하고도 불안해 하는 세상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풍속이다. 과연 세상이 살기 좋아진 건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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