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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6년(영조 42)에 유중림柳重臨이 ≪산림경제≫를 증보하여 엮은 농서. 16권 12책. 필사본. 홍만선洪萬選의 ≪산림경제≫가 판본으로 간행되지 못하여 권질이 드물어지고 또 내용이 백과사전식으로 되어 있어 농림방면에 이용하는 데는 소홀함이 있었다. 그리고 시간도 흐르고 중국의 문헌도 많이 들어와 종래의 ≪산림경제≫를 수정·첨삭은 물론 대폭 증보하게 된 것이다.

항목은 복거卜居·치농治農·종수種樹·양화養花·양잠養蠶·목양牧養·치포治圃·섭생攝生·치선상治膳上·치선하治膳下·구황救荒·가정상家庭上·가정하家政下·구사상救嗣上·구사하救嗣下·구급救急·증보사시찬요增補四時纂要·사가점후四家占候·선택選擇·잡방雜方·동국산수록東國山水錄·남사고십승보신지南師古十勝保身地·동국승구록東國勝區錄 등으로 되어 있다.

즉, ≪산림경제≫의 16항목이 이 책에서는 23항목으로 증보되었고, 각 항목에서도 첨가가 이루어져 있다. 한편 ≪금양잡록衿陽雜錄≫을 많이 인용하였고, ≪감저종식법甘藷種植法≫의 내용도 첨가되어 있다. 그 밖에 벼의 품종명이 추가되었으며 이름에도 한글 이름이 첨가된 것을 볼 수 있다. 또, 옥수수의 재배법이 최초로 이 책에 나와 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산림경제≫의 저자의 언급뿐만 아니라 다른 인용문헌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수수께끼가 있다. ≪산림경제≫가 간행을 못 보고 수사본手寫本으로 남아 저술이 된 지 30년까지도 저자의 이름조차 밝혀지지 않아 정약용丁若鏞 또는 박세당朴世堂의 저서라고까지 잘못 전하여졌다.

 

≪참고문헌≫ 農林水産古文獻備要(金榮鎭, 韓國農村經濟硏究院,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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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1년(중종 36) 10월 안위安瑋·홍윤창洪胤昌 등이 지은 구황서救荒書. 1권. 사본.

 

[개요]

안위가 충주에 근무하고 있을 때 지은 것이다. 이 책은 서문·목차·발문 등이 없는 일종의 절목節目 형태로 구성되어 있는데, 27개항이 30면에 필사되어 있다. 이 책은 광복 이후 일본에서 반환문화재返還文化財로 들여와 마이크로필름화되어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은 우리 나라 구황서 가운데 현존하는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다른 구황서와 다른 점은 이두문吏讀文의 토가 달려 있다는 점과, 개조식個條式으로 조목화條目化된 일종의 절목 형태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용]

첫째, 절식節食이 극히 강조되어 있다. 절식의 방법으로는 죽粥을 만들어 먹거나, 가식성초류可食性草類를 섞어 먹거나, 또 일일삼식 중 일식을 결하는 등의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둘째, 귀신을 제사하거나 불공을 드리기 위하여 음식을 장만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셋째, 식량이 없다고 하여 유리걸식하는 일들을 금하고 있다. 넷째, 진휼청사목賑恤廳事目에 따른 구휼을 강조하고, 흉년에 대비한 비축을 강조하고 있다. 다섯째, 구황용 장醬은 식량으로서가 아니라 굶어 부종浮腫이 나는 것을 예방하거나 기력을 유지하는 데 유효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여섯째, 구호관계로 아사에 직면한 자나 동상에 걸린 자를 다루는 요령과 진황전陳荒田(손을 대지 않아 묵고 거친 땅)의 개간, 흉년에 임하는 부자의 자세, 유랑민과 기아棄兒에 대한 조처, 흉년의 농우農牛 및 노비·도둑 등에 대한 대책 등 치안적인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구황식에 대한 방법 제시뿐 아니라, 당시의 풍속을 바로잡으려는 의지가 엿보인다는 점도 다른 구황서와 다른 점이라 하겠다. 또한, 이 책은 온갖 국력을 기울이더라도 주린 백성을 구휼할 수 있는 방법은 초근목피밖에 없었다는 당시의 실상을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농정사와 사회상을 연구하는 데도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국립중앙도서관에 마이크로필름으로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韓國食經大典(李盛雨, 鄕文社, 1981)
≪참고문헌≫ 農林水産古文獻備要(金榮鎭, 韓國農村經濟硏究院,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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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하권에는 일반 농작물의 재배에 관한 것을 ≪농가집성農家集成≫을 참고하여 서술하고 있다. 이 책의 서문을 보면, 자신이 이와같은 책을 저술할 수 있는 것은 초야에 묻혀 살기 때문에 가능하였다는 구절로 보아, 강와는 실학을 연구하던 시골의 한 유생으로 여겨진다.

우리나라의 식품관계서로는 ≪산거사요山居四要≫와 ≪지봉유설芝峯類說≫에 이어 1691년(숙종 17) 완성된 이 책은 세번째의 식품서인바 그 수나 풀이의 수준에 있어서 그 이전의 것에 비하여 한층 발전된 형태이다. 우리나라 식품사연구에 귀중한 문헌으로, 17세기 우리나라 전통식품을 밝히는 데 좋은 기록을 남겼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韓國食經大典(李盛雨, 鄕文社, 1981)
≪참고문헌≫ 農林水産古文獻備要(金榮鎭, 韓國農村經濟硏究院,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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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후반 서호수徐浩修가 편찬한 농업기술서. 현전하는 것으로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8권 초고본으로 성균관대학교 소장본이고, 다른 하나는 4권 목판본으로 일본 오사카부립도서관大阪府立圖書館 소장본이다.

또한, 수록된 내용에 있어서도 후자는 전자의 3권까지를 수록하고, 거기에다가 전제田制·수리水利·농기農器의 조목을 보충한 것으로 양자간에 차이가 있다. 편찬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책의 범례에 쓰인 내용으로 보아 필자가 죽기 직전까지 편찬을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우리나라 농학의 전통 위에서 우리 나라의 자연 조건을 반영하고 중국의 농업 기술까지도 수용해 전제·수리·농기에 관한 문제들을 포함하는 새로운 농학의 체계화를 기도한 것이다.

본문에 앞서 범례를 싣고 있는데, 여기에는 편찬 동기·목적, 그리고 편찬 원칙 등이 수록되어 있다. 본문은 농학에 관한 내용 이외 의약학醫藥學이나 복거卜居에 관한 내용까지도 수록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의 다른 일부 농서에서도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이 책은 ≪농가집성農家集成≫ 등 기존 우리 나라의 농서를 주자료로 이용하면서, 주로 ≪산림경제≫·≪증보산림경제≫ 등의 농학 체계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중국의 농서로서 참고된 것은 왕정王楨의 ≪농서≫와 서광계徐光啓의 ≪농정전서農政全書≫가 있다.

이 책의 농업론은 거의 같은 시기에 쓰인 ≪북학의北學議≫나 ≪과농소초課農小抄≫의 농업론과 더불어 또 다른 특색을 이루고 있다. 또, 우리 나라의 농학을 기본으로 하고 중국 농학에서 적합하다고 인정되는 부분을 선별적으로 수용, 하나의 체계를 수립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우리 나라 농학사상 일정한 의의를 지닌다.

 

≪참고문헌≫ 增補 朝鮮後期 農業史硏究(金容燮, 一潮閣, 1992)
≪참고문헌≫ 政府의 農書編纂計劃과 당시의 農學思想(金容燮, 朝鮮後期 農業史硏究 Ⅱ, 一潮閣,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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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신중후辛仲厚가 편찬한 종합 농업기술서. 2권 1책. 본래 상하 2권(책)으로 구성된 것이나 현존하고 있는 것은 82면의 하권 1책뿐이다. 편찬연대와 편찬동기는 알 길이 없으나, 유척기兪拓基가 쓴 ≪지수재집知守齋集≫ 15권에 후생록 서문이 수록되어 있어, 후생록은 유척기의 생존연대인 1767년(영조 43) 이전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된다.

편찬자는 이 책을 저술함에 있어서 우리 나라의 구황서救荒書와 저술 당시의 관행농법인 근법近法, 또는 속방俗方을 많이 인용하고 있으나 중국의 농서도 빈번하게 인용되어 있다. 특히, 그 가운데 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는 것은 ≪사시찬요四時纂要≫와 ≪신은서神隱書≫로서 이 두 책을 저본으로 한 것 같다.

이 책의 하권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을 살펴보면, 종소種蔬에는 가지·고추·무·상추·파·미나리·마늘·생강·배추·수박·오이·참외·동아 등 20여 종에 대한 기록이 수록되어 있고, 종약種藥에는 지황地黃·구기枸杞·오미자五味子·당귀當歸·맥문동麥門冬·천궁川芎 등 12종의 약용작물에 대한 기록이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 별종제품別種諸品이라 하여 대나무·연·담배·홍화紅花·쪽 등 12종이 추가되어 있다.

그리고 목양牧養에는 소·말·돼지·양·닭·거위·오리·물고기·누에·꿀벌 등에 대한 기록이 수록되어 있고, 구황방救荒方에는 10종의 구황식에 대한 조제調製 및 이용법이 설명되어 있다. 또, 벽곡제방에는 흡일법吸日法·불외한不畏寒 등과, 각종 장담그기, 식초만들기, 기름만들기, 술빚기 등이 설명되어 있고, 기용器用·조묵造墨·조필造筆·잡방雜方·생재生財 등 33종의 기타 기록이 첨가되어 있다.

이 책은 ≪산림경제≫ 이후 우리 나라의 종합농업기술을 다룬 두 번째 전통농서로서 ≪증보산림경제≫가 나오기까지 약 50∼60년의 우리의 관행농법을 대부분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농업기술사상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農林水産古文獻備要(金榮鎭, 韓國農村經濟硏究院,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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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은 땅에서 물이 솟아나는 곳을 말한다. 물이 솟듯이 힘이 솟는 것도 ‘샘솟다’라고 표현한다.

샘이 있는 곳이면 사람들이 모여 살기에 적합한 땅이다. 그래서 샘과 관련된 땅이름도 매우 많다.

다만 ‘샘’은 솟아오르는 물이 적으며, 모여 사는 사람들이 많지 않기에 행정 지역의 이름으로 쓰이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래서 큰 고을 이름은 ‘샘’에 해당하는 한자어 ‘천泉'이나 ‘정井'이 붙는다.

예를 들어 ‘뒷샘골’을 북천동北泉洞으로 맞옮겼으니 ‘북’은 방향으로 볼 때 뒤쪽에 해당하며, ‘천’은 ‘샘’을 뜻한다.

‘샘’은 지역 따라 발음 차이가 심하다. ‘시암’이라고 일컫는 지방이 많은데, 전북에서는 ‘통시암[桶井]', ‘시암내[元泉里]', ‘참시암골[寒泉]'은 익산이나 정읍 지역에서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는 땅이름이다. ‘참시암골’에서 ‘참’은 ‘차다’의 ‘찬’이 바뀐 것이다.

또한 ‘시암’은 ‘시양’으로 바뀔 수도 있다. ‘시양골’도 전북 지역에서 비교적 자주 찾을 수 있는 땅이름이다.

‘샘’에 ‘골’(고을)이 붙으면 ‘샘골’을 이루며, 이때의 ‘샘’은 ‘골’에 있는 여린입천장소리 기역을 닮아 ‘이응’으로 바뀌면서 발음이 ‘생골’로 된다.

 이렇게 바뀐 ‘생골’은 ‘생사 관념’을 만들어내며, 관련된 전설이 생겨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죽음에 다다른 사람이 살고 싶어 한 마을’, 또는 ‘괴로운 삶을 벗어나고자 한 사람이 꿈속에서 다녀왔던 마을’이라는 이야기는 이름에서 우물이 사라진 생골에서 생겨날 수 있는 이야기 형태다.

 

허재영/건국대 강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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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재덕(1858-1932)     신천 농민학교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천

 

왕재덕(王在德)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청상과부가 된 후 혼자서 3남매를 키우면서 굉장한 치재(治財)를 하여, 황해도 신천에 농민학교를 설립한 일제하 민족교육의 실천가이다. 또한 그의 아들과 사위는 항일민족 독립운동에 생애를 바쳤고, 왕재덕 자신도 적지 않은 군자금을 마련해주었던 한민족의 의로운 어머니였다.

왕재덕


1910년 12월 일제는 전국의 민족운동자를 체포하고자 소위 안악(安岳)사건을 꾸몄다. 이때 그의 아들 이승조도 안명근(安明根: 安重根 義士 四寸), 김구(金九) 등과 더불어 옥고를 치르고 울분으로 병사하였다. 또한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친동생인 안정근(安定根)은 그의 사위가 된다. 이처럼 항일민족운동과 깊은 관련을 가진 그는 1858년 6월 18일(陰) 황해도 신천(信川)에서 부농인 왕시권(王時權)의 둘째 딸로 태어났으나 언니가 죽어 실제로는 무남독녀였다. 18세에 같은 신천의 이영식(李永植)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29세의 젊은 나이로 남매와 유복자를 가진 채 과부가 되었다. 그는 그의 운명을 비관하지 않고 3남매의 교육과 치산(治産)에 남다른 힘을 썼다.

♠ 치산에 힘써 대지주로 성장
그가 과부가 되었을 때 그는 3백석을 추수하는 토지(약 3만원의 가치)를 유산으로 받았으므로, 한평생을 능히 편안하게 살 수가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몸소 팔을 거두고 농사일을 비롯하여 돈이 되는 일에 머리를 쓰고 노력을 하여, 만년에는 만석지기 대지주가 되었다. 그가 여자의 몸으로 이처럼 큰 재산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첫째 우수한 농업경영 능력을 들 수 있다. 둘째는 몸을 돌보지 않는 자신의 노력이다. 셋째는 반드시 해내겠다는 투철한 투지와 근검절약의 생활이라 하겠다.

그가 7일경(耕)의 면화농사를 몸소 지을 때 일년이면 약 9천근(50포)의 면화송이를 따야 했다.
서양에서도 면화는 흔히 흑인 노예로 하여금 따게 하는 중노동이다. 그런데 부자집 마님이나 다름없는 그가 뙤약볕 아래서 온종일 면화송이를 땄다. 어떤 때는 몸이 너무 피곤하여 흰 돌조각이나 사금파리를 땅에 떨어진 면화인 줄 알고 주운 일이 있을 정도로 열심히 일하였다. 면화 농사는 노력한 만큼의 높은 이익이 나지 않음을 알고 그는 다시 좁쌀 농사에 착수하였다. 좁쌀은 평안도 일대에서 많이 소비되는 곡식이며, 면화에 비하여 농사손이 덜 가면서도 이익이 좋아 상당한 수익을 올렸다.

그는 신천 일대에서 벼농사를 지을 때도 추수한 벼를 그대로 파는 일이 없었다. 벼를 배에 실어 진남포의 정미소로 운반해 도정한 후 백미를 다시 평양(平壤) 등의 도회지에 내다 판다. 이처럼 산지(産地)에서의 산출로부터 대도회지의 소비에 이르기까지 전과정의 이윤을 수입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늘어나는 이윤으로는 값싼 황무지를 사서 개간하여 옥토(沃土)를 만들곤 하여 마침내 대지주로 성장한 것이다. 그가 토지를 매입할 때는 절대로 옥토를 사지 않고 남이 거들떠보지 않는 초지(草地)와 같은 값싼 땅을 사서 그것을 개간하면 값비싼 땅이 되는 것이었다.

그의 농지경영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가를 보여주는 예이다. 원래 황무지 개간은 너무도 힘드는 일이므로 옛날에도 권세가가 아니면 엄두내기가 어려운 것인데 과부의 몸으로 해냈다는 것은 그가 가히 장부로서의 기개를 지녔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는 토지를 생명으로 알았다. 그러므로 자신의 토지에 관한 일이면 그 상대가 누가 되건 결코 양보하는 일이 없다. 그는 무학이었지만 머리가 명석하여 자신의 토지 평수와 추수기와 현금출납에 환하여 장부책보다도 더 정확하였다. 또한 사리가 분명하고 교제에도 능하였으며, 후리후리한 키에 다소 억세게 생겼으되 깔끔하게 다듬어 쪽찐 머리 등 외모는 가히 남을 위압할 만한 풍모까지를 지녀 그는 한눈에 보아도 투지가 강한 여성으로 보였다.

한번은 토지 소유문제로 인하여 서울의 유력자와 소송이 붙었다. 상대방은 변호사까지 대고 소송을 하였으나 왕재덕은

‘법이 따로 있나, 경우가 법이지!’
하고 조리있게 항변하여 승소하였던 일이 있다. 또 군청에 제출한 토지증서가 몇 번씩 퇴각을 당하자 감농(監農)할 때 타고 다니는 당나귀를 타고 관청에 들어가 담당직원 앞에 서류를 내놓고

‘여기 틀린 데만 골라서 기입해주시오.’
하고는 준비해간 담배를 군 서기들에게 나누어주고는 아무 말없이 끈질기게 앉아 기다려 서류를 완비해온 일이 있었다.
신천 온천 일대에는 왕재덕의 땅이 적지 아니 있었다. 그런데 구한 말 이래의 매국노의 한 사람인 세도 당당한 송병준이 신천 온천에 있는 초생지를 논으로 개간하는 데 왕재덕의 전답이 손해를 보게 되었다. 그는 여러 해 소송 끝에 승소하여 오히려 그 땅을 매입하고 말았다. 토지에 대한 그의 투지력은 세도 당당한 친일파는 물론 일본인까지도 굴복시켰다. 조선철도회사에서 사리원 신천간에 철도를 놓고 철도 호텔을 신축하고 육군전지요양소를 설치할 때였다. 어느 일본인이 여관을 지으려고 대지를 샀는데 그 대지 한가운데에 왕재덕의 땅 99평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일본인은 그녀를 우습게 보았던지 그 땅을 정식으로 매입하지도 않고 건축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녀의 강한 항의로 공사는 중단되고 싯가 50전의 땅값을 올려 10원까지 갔으나 결코 팔지 아니하여 일본인은 크게 손해를 보고 돌아갔다. 철도회사에서 신천온천 역사를 지을 때도 역을 지을 땅을 팔라는 교섭을 받았으나 끝까지 버티다가 관청의 설득으로 싯가의 6배가 되는 값을 받고야 팔았던 것이다.

♠ 생활개선운동 펴고, 독립운동가에게 군자금 제공
만석군으로서의 그의 위세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평상의 삶을 살펴보면 검소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의복은 항상 목면으로 깨끗하게 입었고 평생 군것질을 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무엇이나 비합리적인 것은 개선, 개혁하여야 한다는 진보적 의식을 가졌으며 이를 실천하도록 독려하는 실천가이기도 하였다. 생활개선운동이 한창 일고 있던 1927년 그녀는 부인생활개선을 주장하였다. 황해도 평안도 지방에서는 큰머리를 올리느라 월자(月子)를 값비싸게 구입하여 썼다. 왕재덕은 이것이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 큰 낭비라고 주장한 끝에 서울에서 비녀 80개를 사다가 부인 80명을 자기 집에 불러 모두 나누어 주었다.

농촌 부녀자들의 목화 고르기 작업 장면


또한 자신의 소작인들에게 금주ㆍ금연을 권고하여 새생활을 하도록 하였다. 또 흉년이 들 때면 소작료를 감해주고 극빈자에게는 곡식을 풀어 끼니를 잇게 하는 자애로운 어머니로서의 배려를 하였다. 그 뿐만이 아니라 독립운동가들에게 비밀리에 군자금을 건네주고 국내외의 비밀연락도 하였던 장부였다.

♠ 농업학교 설립, 전재산 헌납
왕재덕이 한평생을 토지로써 치부(致富)한 것은 일신의 영화나 자손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농업으로 성공한 그녀는 농업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농촌을 구제하려면 농민학교를 설립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당시 국내에서는 농촌계몽운동이 크게 일고 있었으며, 또 덴마아크가 고등농민학교를 세워 세계의 모범적인 농업국으로 발전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왕재덕은 농민학교를 세울 결심을 하게 되었다. 1929년 그는 자신의 뜻을 밝히고 신천 북부면 서호리에 있는 10만 평의 토지와 현금 1만 원을 내놓았다. 이것으로 25평의 교실 2개와 직원실을 짓고 방 24개의 기숙사를 지었다. 그리고는 수원농민고등학교 출신을 교사로 초빙하여 40명의 학생을 입학시켜 가르치게 하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 2월 12일에 신천농민학교 인가를 정식으로 받았다. 이에 학생 수도 증가되었다. 다시 학교를 증축하도록 6만 원의 거액을 희사하였다. 그러자 교사의 수도 늘고 농사실험장도 만들었다. 이제 농민학교의 틀이 잡혀가 농민학교를 농업학교로 개칭하게 되었고 20만원의 재단법인도 설립하여 성공적인 농업학교로 발전해갔던 것이다.

그는 자녀가 있는 분이었다. 평생 모은 재산을 자녀에게 남기지 아니하고 2천만 민족에게 남기었다는 것은 실로 장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932년 5월 8일 그녀는 74세를 일기로 위대한 한 생을 이민족의 핍박으로 신음하는 한민족의 큰 별이 되어 이승을 떠났다.

글:박용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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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군 적성면 기동리 솔고개 마을의 장종환 어르신을 찾아뵙고, 소 쟁기질을 듣다.

아래는 직접 쟁기를 메우고 시범을 보여주시는 모습.

부리망까지 찾아서 채우셨다.

우수 지나 2008년 2월 22일 찾아가, 소도 한창 털갈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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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연합뉴스) 박병기 기자 = 충북 옥천군 안남면 들녘에서 누런 황소에 쟁기를 매달아 자갈밭을 갈아엎는 농부들의 모습의 모습이 정겹다.

충북 옥천군 안남면 이준호(72) 씨 부자가 요즘 구경조차 하기 힘들어진 쟁기로 씨감자를 파종할 자갈밭을 갈고 있다.
이씨는 9일 "경사진 자갈 밭을 갈아엎는 데는 뭐니뭐니해도 쟁기가 최고"라며 "쟁기를 처음 끌어보는 소가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아 아들과 한 조가 돼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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