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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운동이 되어 가는 생태농업 2

 

 

 

쿠바는 생태농업의 세계 모델

 

2010년 5월 11~14일에 걸쳐 쿠바 농림기술협회(ACTAF = Asociacion de Tecnicos Agricolas y Forestales-Cuba)의 주최로 아바나에서 제8회 유기농업·지속가능한 농업 국제회의가 내셔날호텔에서 개최되었다. 국제회의는 생태농업에 기반을 둔 지속가능한 농업을 개발하고자 쿠바 및 라틴아메리카·카리브해의 여러 나라가 교류하는 장으로서, 농업기술자·가공업자·교육자·연구자·농업정책 담당자들의 사회운동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의제는 아래와 같다.

 

1. 도시와 그 근교의 농업

2. 무니시피오(시·읍·면)의 농업 개발

3. 농업에서 젊은이와 여성의 역할

4. 시장, 무역과 유기농산물 인증

5. 식량 안전보장과 연대

6. 지속가능한 농업을 위한 기술

7. 생태농업을 추진하기 위한 소통 방법

8. 지구의 기후 변동 문제

9. 에너지와 대안 기술의 사용 방법

10. 생태농업의 교육, 연구, 보급

11. 생태농업 체계의 경영과 평가

 

회의에 앞서 5월 6~9일에는 피날 델 리오주Pinar del Rio州, 아바나주, 아바나시, 마탄사스주, 산타클라라주, 상티 스필투스 등의 각 주에서 현장 시찰도 이루어졌다. 또 회의 뒤인 5월 15~19일에도 열대농업기초연구소(INIFAT)에서는 도시농업을, 도시 근교농업과 쿠바 소농협회(ANAP)에서는 생태농업 연수회도 열었다.

 

국제회의에는 22개국이 참가했는데, 의장을 맡은 것은 소농협회의 올란도 루고 폰테Orlando Lugo Fonte와 후안 페레즈 라마스Juan Pérez Lamas 농업 차관이다.

루고 폰테는 쿠바에서 농업 분야 증산에 생태농업 기술을 활용한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고, 토양과 환경 보존에도 도움이 되며 화학비료가 부족한 쿠바에서는 생태적 기술을 써서 만드는 유기비료를 빠뜨릴 수 없다고 했다.

쿠바의 국제회의는 라틴아메리카 생태농업 학회(SOCLA= Sociedad Cientifica LatinoAmericana de Agroecologia), 라틴아메리카 생태농업 운동(MAELA = Movimiento Agroecologico de America Latina y El Caribe)과 함께 주최한 것으로, ‘제6회 라틴아메리카 생태농업 지역운동회의’도 겸하고 있었다.

 

그래서 개최식에서는 라틴아메리카 생태농업 학회의 미구엘 알티에리Miguel Altigri 대표가 이렇게 말했다.

 

“온 세계의 금융위기, 에너지, 사회 위기는 세계의 몇 백만 명에게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가뭄, 홍수, 허리케인과 기후변동도 국제적인 과학화에 대한 도전입니다. 이 현상에 대응하는 새로운 농업 모델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쿠바는 자원의 합리적인 이용과 환경 보전의 세계 모델입니다.”

 

알티에리는 생태농업에 기반을 둔 지속적 농법을 개발한 쿠바의 농민들을 높이 평가했다. 미구엘 알티에리 대표는 운동의 일환으로 생태농업이 왜 필요한지, 그리고 학회가 탄생한 경위를 웹사이트에 적어 놓았다. 내용의 요지를 소개하겠다.

 

 

운동으로서 발전해 온 생태농업

 

중국, 유럽, 미국 등은 소의 먹이로 수출용 유전자조작 콩을 공업적으로 생산한다. 선진국의 바이오연료 수요에 응하여 사탕수수, 옥수수, 콩, 팜유, 유칼립투스 등을 생산한다. 이러한 지구 규모의 수요가 라틴아메리카 농업의 모습을 변모시켜 나아갔다. 그리고 아직도 경험하지 못한 경제, 사회, 그리고 생태적인 위험을 가져오고 있다. 공업형 농업은 비싼 가격의 석유에 의존한다. 생태계와 생물다양성의 보전에 위협이 된다는 것에 더해, 대규모 단작은 기후변동에도 취약하다. 수출형 농업과 바이오연료 모델을 추진하여 소농들의 지역 자급력도 빼앗아 갔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응하여 그 20년 동안 식량주권과 생태농업이란 개념이 꽤 주목받아 왔다. 근대 농학과 선주민의 지식 체계를 접목한다. 이 새로운 농업기술은 몇 천 명의 농민들 사이에 보급되고 있으며, 농업 생물다양성과 토양과 물을 보전하면서 농촌 지역사회의 식량안전 보장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 NGO·정부·학술기관에 의해서 실증되고 있다. 지속형 농업을 촉진시키고자 몇 백 개의 NGO가 생태농업을 활용하고, 여러 대학에서도 생태농업 학과와 석사 과정을 개설하고, 브라질·쿠바·베네수엘라·볼리비아·페루 정부는 농업 개발전략의 일부에 생태농업을 넣고 있다. 농민운동 비아 캄페시나, 브라질의 소농운동(MPA=Movimento dos Pequenos Agricultores), 토지 없는 농민운동(MST =Movimiento de Trabajadores sin Tierra) 등도 식량주권을 촉진하고자 생태농업을 제창하고 있다.

 

 

생태농업 학회 탄생

 

생태농업에서는 복잡한 농업 체계를 중시한다. 생태계의 생태적인 상호작용과 시너지에 의해서 최소한의 에너지 투입량으로 땅심을 유지하고, 생산성을 확보하며, 농약에도 거의 의존하지 않고서 작물을 보호해 나아간다. 또 생태농업은 단순한 농법에 머무르지 않는다. 풀의 뿌리를 연구하고, 농민에게서 농민으로 보급되는 수단을 통해 농민들 자신이 기술을 혁신·평가하고 적합하게 만드는 지역사회의 능력도 중시한다. 또 환경보전과 생물다양성은 지역 문화와도 깊이 관계한다. 그래서 지역사회의 참가를 중시하고, 문화를 지키며, 소농의 다면적 기능도 발휘해 나아간다. 인적자원을 개발하는 것으로 농촌 주민, 특히 자원이 부족한 농민을 위한 선택지를 늘려 나아간다. 이와 같이 지속가능하게 농업 생태계를 관리·설계하기 위해, 생태학의 개념과 원칙에 기반을 두고 복잡한 농업 생태계를 평가하기 위한 과학의 틀과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 ‘생태농업 과학’이다. 연구·교육·보급 사업에 걸친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이 새로운 농업을 설계해야 한다는 인식이 높아지면서 라틴아메리카 생태농업 학회가 탄생했다.

 

학회의 첫 회의는 2007년 8월 13~15일에 콜롬비아 북서부의 안티오퀴아주 메델린Medellin에서 안티오퀴아대학(Universidad de Antioquia) 등 콜롬비아의 학술기관과 공동으로 개최되었다. 비아 캄페시나, 브라질 등의 주요 농민조직 대표,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카리브 지역 생태농업 운동(MAELA), 라틴아메리카 대안 탈 농약 네트워크RAPAL= Red de Accion en Plaguicidas y Sus Alternativas para America Latina), IFOAM 등 생태농업을 추진하는 주요한 NGO의 대표 500명이 참가하여, 농약·환경·사회 등 다양한 과제를 논의했다. 생태적인 병해충 방제, 토양 관리, 민족생태학(ethnoecology), 생태경제학 등 여러 갈래에 걸친 생태농업 기술의 분석이 이루어졌다.

 

또 라틴아메리카에 영향을 미치는 긴급 과제, 기후변동·생명공학과 바이오연료 작물·세계화와 자유무역협정, 기업형 유기농장의 식량주권 등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졌다. 또 각 단체는 자신들이 직면한 과제와 활동을 설명하는 동시에,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교육·연구·보급의 수요를 학회 멤버에게도 설명했다. 이 때문에 학회는 지역의 소농들이 갈망하는 요구가 무엇인지 명확히 알 수 있었다.

 

화석연료에 의존하는 공업형 농업을 전화하고, 기후변동에 강한 농업을 개발하며, 식량주권과 농촌 지역사회의 삶을 확고히 하는 지역 농업을 촉진하는 것이 그 긴급 과제이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지속가능한 농업 개발전략의 과학적 근거로서 생태농업학을 개발하고, 식량·환경·에너지 위기의 구조적인 원인에 대처하고, 공업형 농업 모델에 의해서 확산된 파괴적인 경향을 뒤집어엎는다. 이 목적을 위해 첫 회의에서는 이러한 과제에 대한 생태농업 기술을 분석·교육·보급하기 위한 워킹 그룹도 만들고, 전략 계획도 정했다.

 

 

농민과 협동하여 실천과학을 추구

 

학회는 라틴아메리카 14개국의 연구자, 교수, 보급원 등 260명의 구성원으로 구성된다. 학회의 강점은 수많은 대학과 NGO, 라틴아메리카·카리브 지역 생태농업 운동, 라틴아메리카 대안 탈 농약 네트워크, GALCI 등 브라질 생태농업협회(ABA= Brazilian Agroecological Society), 생태농업 스페인협회(SEAE= Sociedad Espanola de Agricultura Ecologica), 비아 캄페시나, 브라질의 소농운동, 쿠바, 페루 등과 협력하고 있다.

 

예를 들면 다량의 농사땅에서 바이오연료 작물을 생산할 경우, 식량안전 보장과 생물다양성 등에 어떠한 영향이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분석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농업생산성에 기후변동이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 예측하는 모델은 개발되어 있지만, 가뭄과 불안정한 강우에 강한 생태농업 체계에 대한 연구는 크게 누락되어 있다. 그래서 학회는 3년마다 과학 회의를 여는 것과 함께, 각 나라에 단기 훈련 과정을 개설하고 있다. 또 지속가능한 농업에 유용한 대안기술, 공정한 시장, 지역 농업 개발전략, 정책 개혁의 정보를 농촌사회와 시민운동에 제공하고 있다. 생태농업 스페인협회와 무르시아대학(Universidad de Murcia)과 협동하여 일련의 백서로 워킹 그룹의 성과도 널리 발표되어 있다. 또 학회는 라틴아메리카의 대학 네트워크와도 연대하여 콜롬비아대학(Univeridad Nacional deColombia)과 안티오퀴아대학과 협동하고, 학회는 고도의 이론과 실천 수준을 가진 전문가를 양성하고자 생태농업의 유일한 박사 과정도 개설했다.

 

제2회 라틴아메리카 학회는 2009년 11월 9~12일에 브라질의 쿠리치바에서 브라질 생태농업 협회의 협력을 받아 개최되었다. 의제는 ‘농민과 가족농업 : 지속가능한 미래를 구축하기 위한 과거·현재의 경험’이다. 학생, 농민, 연구자, 교수 등 3000명 이상이 참석하고, 미래가 없는 공업형 농업 모델에 대응하여 참으로 지속가능한 대안으로서 생태농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쿠바에서 국제회의가 열린 사전 움직임으로는 이러한 일들이 있었다.

 

 

written by 吉田太郞, translated by 김서방

 

 

 

인용문헌

(1) The Latin American Scientific Society of Agroecology ( Sociedad Cientifica LatinoAmericana de Agroecologia-SOCLA) launched

(2) Miguel A. Altieri, The Latin AmericanScientific Society of Agroecology (SOCLA): a network of researchers, professors, extentionists and other professionals to promote agroecological alternatives to confront the crisis of industrial agriculture in the region

(3) Cuba: An Example in Using Agroecology, Aldia.cu, May12,2010.

(4) Cuba is an Example of Agro-ecology, says expert, Cuban Daily News,May15,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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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경제의 현황과 문제점

 

 

1, 스페인의 지배 (16세기 초~19세기 중엽)

 

쿠바는 1492년 콜럼버스가 발견한 이후 1511년부터 스페인의 식민통치를 받았다. 식민지배 초기에는 주로 담배와 커피경작지로 이용되었으나 점차 아프리카 노예를 활용하는 사탕생산으로 바뀌게 되었다. 특히 1762~1763년 스페인이 본국의 내부 문제로 쿠바에 대한 관심이 소홀해진 틈을 이용하여 영국이 쿠바에 진주, 대규모 제당공장을 설립함으로써 대규모 사탕 및 커피생산에 기초한 플란테이션 농업이 발전한다.

➡ 노예무역의 이유 : 백인에 의한 토착민의 전염병(천연두) 확산과 농업과 광업에 적합지 않은 수렵인들.

➡ 노예무역 과정

영 국

공산품 식료품, 원료

아프리카

뉴프론티어지역

(카리브연안, 중남미, 북미)

노예

(실제로 1980년부터 1865년 사이에 쿠바에는 약 60만 명의 아프리카인들이 노예로 유입됨으로써 19세기 중반에는 노예수가 52만 7천명에 이르렀다.)

노예무역으로 시작된 대서양세계무역은 카리브해 지역에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은 열대성 대규모 단작(monoculture)에 의존한 것으로서 이들 지역의 대외의존도를 크게 높이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즉, 단일작물 이외의 거의 모든 소비재나 중간원료, 공산품 등을 해외에 의존케 함으로써 이들 지역이 이른바 대외종속과 저발전의 표본으로 불리게 되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2. 쿠바의 독립운동과 미서전쟁(19세기 후반)

 

10년 전쟁(스페인과 세스페데스) → 잔흔조약 → 스페인의 정치적 개혁 약속 → 1895년 독립전쟁(호세 마르티) → 마르티 전사(1895년 5월) 이후 독립세력 확대

이 와중에 미국은, 쿠바의 사탕산업에 대한 투자를 크게 늘린다. 미국인들은 10년 전쟁으로 황폐해진 사탕수수 재배지를 매입함으로써 쿠바의 사탕수수 산업을 독점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쿠바에 대한 미국의 경제지배는 점차 심화되었으며, 1880년대는 쿠바가 생산한 설탕의 전량이 미국에 판매될 정도로 대미 경제의존도가 높아졌다.

미국은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 정치적으로 스페인의 쿠바 지배를 용인하는 입장을 취했으나, 1896년 4월 미국의회가 쿠바의 독립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채택함에 따라 정책이 바뀌었다.

 

 

3. 미국의 지배 (20세기 초반)

 

스페인 군대 철수(1899년 1월) ~ 쿠바 독립 선포(1902년 5월 20일) 까지. 미국은 1901년 3월 쿠바의회에 플랫트 수정안을 전달.

 

정권

기간

특징

내용

팔마 대통령

1902~1909

친미성향. 부정재선.

미군 군정(1906~09)

고메스

1909~1913

독립유색당 반란

3천여명의 흑인 살해됨

가르시아

1913~1921

부정선거. 챔벨로나의 반란

미군 파견

자야스

1921~1925

부정, 무능, 실패

-

마차도 정부

1925~1934

쿠바국민으로부터 환영

바티스타

1934~1944

배후 조정

멘디에타, 고메즈, 브루

마르틴

1944~1948

사회보장제도 확대, 토지개혁, 산업화 추진, 교육기회 확대, 부의 공정분배

국민들로부터 비난.

소카라스

1948~1952

바티스타

1952~1959

무혈쿠데타, 친미 강화

시위와 반정부운동 강압, 의회 정당 해산

카스트로

1959~

반정부운동

 

① 마차도 정부와 쿠바 경제

마차도 정부는 초기, 경제개형정책을 추진하였으나 마차도와 측근들이 개인의 부를 증대하는 데 힘을 쏟았다. 또한 경제대공황을 맞아 미국이 수입품이 고율의 관세를 부과함에 따라 쿠바의 사탕수출이 크게 감소되었고, 이에 따라 사탕생산이 크게 감소하여 쿠바 경제가 위축되었다.

 

 

4. 카스트로 혁명과 쿠바 경제 변화

 

혁명 이전

혁명 이후

쿠바는 정치적으로는 스페인의 지배를 받고 있으나, 경제적으로는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미국의 영향을 크게 받음. 쿠바에서 생산된 사탕의 대부분이 미국으로 판매되거나 미국을 통해서 세계 각국으로 판매. 쿠바 독립 이후에도 경제적 협력관계 강화. 1901년 양국간 통상협정을 통해 미국은 쿠바산 사탕에 대한 관세↓, 플란테이션과 제당공장 합병. 수출총액의 80%(1902~45) 수입 66%(1911~40) 수출액 중 사탕 80%

카스트로 정권 1959년 5월 17일 농업개혁법 제정 (일정규모이상 토지 국가 매입, 소작농과 빈농에게 분배, 외국인 토지소유 금지) 미국과의 관계 악화. 1960년 2월 소련부수상 쿠바 방문. 5월 소련-쿠바 외교수립. 1961년 미국과의 교역 단절.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경제적 협력관계 강화.

 

 

5. 제1차 경제개발계획(1962~65)과 1960년대 쿠바 경제

 

카스트로 혁명의 우선적인 목표의 하나가 경제운용의 다양화와 설탕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것이었기 때문에, 쿠바정부는 대외의존적인 경제구조를 탈피하고자 공업화와 식량의 자급화를 목표로 제1차 4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고 1962년부터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카스트로의 절대적 신임을 받던 게바라 산업부 장관은 ‘농업에서의 자본축적을 통해 산업화를 추진함으로써 국가발전을 도모한다’는 전략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1960년 10월에 시행된 2차 토지개혁은 사회주의 정권에서의 개혁이었다. 제2차 토지개혁은 개인 농지소유 상한선을 5카발레리아로 설정했고 ,1959년과 1963년 두 차례에 걸친 토지개혁의 결과 국가 소유 토지는 전체의 70%를 점하게 되었다.

그러나 게바라의 산업화전략은 자원배분의 왜곡으로 인한 설탕생산의 감소, 경제하부구조의 미비로 인한 물가앙등, 수출부진으로 인한 무역적자 급증, 재정적자의 악순환 등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특히, 산업화 정책으로 인해 피해를 보게 된 세력이 집결하여 게바라의 정책에 반기를 들면서 기본 정책의 모순과 한계를 비판하였다. 이러한 반대세력의 비난과 외환위기의 악순환으로 게바라는 권력과 권위를 상실하였고 그가 추진하던 산업화 전략도 중단되고 말았다. 사실상 과거 수세기에 걸쳐 시행된 노예제와 선진국들의 자본참여로 확립된 사탕수수 대규모 단작 체제라는 왜곡된 경제구조를 짧은 기간 내에 개편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사탕생산량도 감소됨으로써 쿠바 경제를 위기에 빠뜨렸던 것이다.

 

 

6. 1970년대 쿠바 경제

 

쿠바정부가 최우선순위를 부여하면서 추진한 설탕 1천만 톤 생산은 결국 실패로 끝났을 뿐만 아니라 다른 생산부분을 크게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물질적 유인을 부정하고 근로자들의 혁명적 자기희생을 강조함으로써 경제발전을 이룩하려던 쿠바정부의 계획은 오히려 정권의 안정을 저해하는 저성장의 악순환을 초해하였다.

 

1960년

1961~1975

1975~1984

대 소련 수출

17%

48%

64%

대 소련 수입

14%

45%

72%

 

한편, 소련은 쿠바의 경제적 불안정을 이용하여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설탕생산 부진으로 침체에 빠진 쿠바에 대해 원조와 차관규제를 늘이는 한편, ‘경제과학기술공동위원회’를 설치하여 쿠바정부의 정책결정에 적극 참여함은 물론 일상적인 정책결정과정 및 행정체계에도 간섭하였다. 아울러 쿠바를 COMECON(Council for Mutual Economic Assistance)에 가입시켜 동구권과의 국제 사회주의적 분업에 참여토론 하였다. 이에 따라 쿠바는 경제구조는 시장기능에 의해 조정되지 못한 채 정치적 이념적 결정에 따라 생산, 분배, 교역 등이 조절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혁명 이후 쿠바 경제는 소련에 대한 의존도가 크게 높아지게 되었다.

쿠바 정부는 또 신경제관리계획체제, 시장원리와 체제원리 조화, 공산사화 한계극복 노력, 국가권력 하에서 시장 메커니즘 작동, 물질적 유인제도 재도입을 위하여 노력했다. 그리고 코메콘과의 협력 하에 연평균 6% 성장을 목표로 하는 제1차 경제사회개발 5개년 개획도 시작 되었다. 그러나 제1차 계획은 원당국제가격의 폭락, 석유파동 등으로 인해 성장부진으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1980년 12월에는 제2차 5개년계획(1981~85)이 발표되었다.

 

 

7. 1980년대의 쿠바 경제

 

제2차 경제사회개발 5개년계획은 1차 계획보다 낮은 연평균 4~5%로 조정하였고, 설탕생산 목표는 1000~15000만 톤, 니켈생산 목표는 10만 톤으로 설정하였다. 또 소련으로부터 총 300억 루블 (약 350억 달러)에 달하는 재정적 뒷받침을 받게 된다. 쿠바는 비록, 경제구조면에서 많은 취약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소련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안정된 경제성장을 유지했고 소득분배, 문자해독 등에서도 상당히 발전된 상태였다.

 

평균수명 (연)

유아사망률(1000명당)

문맹률 (%)

도시지역 실업률(%)

아르헨티나

브 라 질

칠 레

멕 시 코

페 루

우루 과이

베네수엘라

쿠 바

70

63

71

66

60

69

69

74

36

71

24

53

82

38

39

13

4.5

25.5

8.9

17.4

17.4

6.1

15.3

3.9

6.1

5.3

17.2

11.8

11.8

13.1

14.3

3.4

표. 중남미 주요국의 사회지표

 

그러나 성장률을 기간별로 보면 1980년대 전반기에는 연평균 7% 수준을 유지하였으나, 1986~1989년 사이 0.8%로 하락하였다.

쿠바의 경제구조나 체질이 대소의존적 설탕 중신구조로 고착되어 가는 상황에서 일어난 소련의 변화는 쿠바에게 충격적인 것이었다. (1985년 고르바초프 등장) 설탕을 국제가격보다 높은 가격으로 수출하고 소련산 원유를 세계시작가격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공급받음으로써 경제를 유지하던 쿠바는 대안으로 진출할 수 있는 시장도 없었고 경쟁력도 갖추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8. 경제위기 (1989~)

 

1989년 이후 쿠바가 경제적으로 심각한 위기를 겪게 된 원인은 5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① 쿠바의 주요교역상대국인 소련과 동구제국의 급진적 정치, 경제개혁

② 미국의 지속적인 대 쿠바 경제제재 조치

③ 쿠바 계획경제 체제의 비교율성

④ 쿠바 경제에서 절대적 위치를 차지하는 설탕의 국제가격 하락

⑤ 경화부족으로 인한 서유럽국가 및 일본과의 경제, 통상관계 수립 곤란.

 

사회총생산(GNP)는 1989~1892년 사이에 45% 정도 위축되었고, 설탕 수출을 통한 외환수입 감소로 야기된 심각한 외환위기로 인해 조속한 회복은 힘들어졌다. 이 재정위기는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구조적인 것으로 쿠바의 교역이나 대외경제협력 및 거래를 과거 구소련 사회주의체제에 의존하던 것에서 벗어나 시장경제체제에 입각한 새로운 협력관계를 구축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가용외환의 급격한 감소로 수입이 줄어들음으로써 개인소비에 필요한 상품의 수입과 경제를 재편하는 데 필요한 투자가 어려워졌다.

 

수출

수입

미국

소련

미국

소련

1900

1942

1955

1959

1960

1961

1962

1970

1980

1985

1987

1991

1992

71

90

67

73

69

6

1

0

0

0

0

0

0

n.a.

n.a.

n.a.

n.a.

17

48

42

50

57

75

72

63.5

28.5

43

84

74

73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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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보면 쿠바의 경우 처음에는 미국, 나중에는 소련에만 의존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 미국의 경제 제재 + 소련의 붕괴로 헤어날 수 없는 구렁텅이로 빠지게 된 것이지요. 그걸 쿠바는 경제 구조를 새로운 방향으로 선회하면서 살아나지 않았나 합니다. 그 부분 때문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것이구요.

우리는 2009년 현재 대외의존도가 80%대를 조금 넘는다고 합니다. 단순히 수치로만 따지면 1942년의 쿠바와 비슷한 상황이네요.

1970년대 초반 내수시장을 키워야 한다는 학술회의가 있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경제성장만 생각해 수출 위주의 정책을 짜서 대외의존도를 더욱 높여 놓았습니다. 요즘 미국, 일본이 20%대, 중국이 50% 정도이고, 세계 최대 수출국인 독일이 70%대라고 합니다. 아무튼 우리 경제가 엄청 취약한 걸 알 수 있습니다. 스치는 바람에도 쓰러질 듯 위태로운 모습이지요.

우리 스스로 대외의존도를 줄이지 못한다면, 쿠바처럼 외부 충격에 의해서 구조조정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데... 한 번 그런 일을 IMF 외환위기 때 겪었지요. 그때 귀농자가 급격히 늘었다고는 들었습니다. 또 역귀농도 많이 했다고 들었구요.

그런 일은 다시는 없어야겠습니다. 우리 스스로 대외의존도를 줄여 나아가 안정적인 구조로 가야겠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우리 스스로 조정하지 못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충격에 나가 떨어지는 건 겪어봐서 알듯이 없는 사람들이 먼저니까요. 박정희의 빛과 그림자가 아직도 한국 사회에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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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환 선생님이 번역한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의 저자 요시다 타로 선생의 블로그에 들어갔다가 재밌는 글을 보고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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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운동이 되어 가는 생태농업



아시아·생태농업 국제회의


2010년 5월 18~22일. 스리랑카의 콜롬보에서 토지와 농업의 개혁운동(MONLAR. Movement for Land and Agricultural Reform)의 초빙을 받아 비아 깜페시나La Via Campesina는 제2회 생태농업 모임을 개최했다.


제1회는 2009년 8월 베네수엘라의 바리나스Barinas에서 개최되었던 라틴아메리카 모임이었다. 종자나 지식의 독점·민영화, 화학비료나 농약 사용의 촉진에 대해 온 세계 소농의 커뮤니티에 생생한 주체성을 가져오고, 저항·투쟁과 자치 문화의 확립을 강화하려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제2회는 농민 사이의 교류나 연대를 강화하고, 저마다 지닌 지속가능한 농법의 장단점을 밝히며, 빚과 독이 없는 세계를 향하여 아시아에서 생태농업 운동을 전개하고 식량 주권의 원칙을 실천으로 옮긴다는 것이었다. 이 모임에는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8개국의 비아 깜페시나 참가 단체에서 지속적 농업에 착수한 농민, 발기인, 지도자가 참가했다. 비아 깜페시나의 주장은 과격했다.


“농민이나 그 가족에게 정직한 노동조건을 창출하고, 환경적·경제적으로도 지속가능하며, 사회적으로도 공정하고 문화적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는 농업 체계를 다시 구축하려면 우리는 생태농업밖에 없다고 믿는다.”


제2회 모임에서는 기업 집단이 아니라 반드시 농민을 위한 농업 개혁과 식량 주권이 각국 정부에서 추진되도록 ‘생태농업을 위한 정책 창안의 틀’도 원안으로 제창하였다.



생태농업을 평가하는 국제연합 식량 고문


그러나 비아 깜페시나와 마찬가지로 생태농업을 높이 평가하는 인물이 또 있다. 설마 비아 깜페시나 회의와 조정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마치 보조를 맞춘 듯이, 한 달 뒤인 6월 21~22일 브뤼셀에서 국제회의 ‘2050년 세계 식량 수요의 충족을 위한 생태농업적 접근의 기여(The contribution of agroecological approaches to meet 2050 global food needs)’가 개최되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최선의 선택 사항입니다. 그것을 사용하지 않을 여유는 없습니다.”


그렇게까지 주장하고 회의에 참가한 사람은 국제연합 인권위원회에 ‘식량에 대한 권리’를 특별 보고한 올리비에 드 슈터Olivier De Schutter 박사이다.


일본에서는 저작 “세계의 절반이 굶주리는 것은 왜(한국에서는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로 유명한 장 지글러Jean Ziegler가 있다. 드 슈터는 그의 직위를 계승했는데, 2008년에는 일을 맞자마자 “현재 일어나고 있는 세계의 식량 위기는 과거 20여 대국의 잘못된 정책으로 일어났다”고 단언하였다. 식량 위기에 대해 “이것은 바야흐로 시작되고 있어서、싼 값의 식량이 넘치던 시대는 끝났다”고 말하고,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이 농업 자금의 필요성을 과소평가해 왔는데, 그중에서도 IMF에 대해 “부채를 포함한 개발도상국에 식량 자급을 희생시킴으로써 돈벌이작물의 생산이나 수출을 요구했다”라고 비난하고 있다.


드 슈터는 벨기에 사람으로 지금은 프랑스의 인권 교수인데, 도대체 어떠한 사상의 소유자일까? IPS가 회의에 앞서 행한 인터뷰의 일부를 발췌해 보자.


당신의 전임자인 장 지글러 씨는 일찍이 아이가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는 때에 "그 아이는 살해된 것이다"고 말하였습니다. 동의하십니까?


“동의합니다. 해마다 300만 명의 아이가 영양불량으로 죽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발도상국에서는 3명 가운데 1명의 아이가 빈혈로 고생하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상황의 원인을 따라가면, 결국 정부에 의해 이루어진 잘못된 결정에 다다릅니다.”


그리고 EU의 바이오연료 정책도 문제입니다.


“바이오연료가 가져온 큰 영향은 토지를 집중시켜, 토지의 불안을 높인다는 것입니다. 과거 2~3년 동안 제가 방문한 꽤 많은 발전도상국에서, 농민들의 불평은 어디나 똑같았습니다. 자신들이 토지에서 쫓겨날 수 있다고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선주민이나 소농들의 생활에 빠질 수 없는 토지의 소유권이 반드시 법적으로 인정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EU는 바이오연료가 지속가능하게 생산되도록 최근 인증평가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문제를 고려하고 있지 않습니다. EU의 인증 기준에 완전히 빠져 있는 것은 바이오연료의 생산이 농촌 지역에 가져온 격차의 영향입니다. 모두는 아니라고 해도, 바이오연료는 넉넉한 사람에게는 메리트가 있지만 가난한 사람의 생활을 위해서는 아닙니다.”


드 슈터는 화학비료는 악령으로 묘사해서는 안 되고, 흙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인산염과 같은 외부 투입 자재도 필요하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유전자 조작 기술에 대해서는 꽤 비판적이다.


“생태농업은 작물에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생태계에 있는 식물에 초점을 맞춰 식물을 훨씬 큰 체계의 일부라고 간주합니다. 그렇지만 유전자 조작 기술은 기본적으로 식물을 환경과 분리시킵니다. 게다가 유전자 조작 기술은 극소수의 기업이 손에 넣고서 지적소유권으로 보호받는 종자에 농민들이 의존하게 만듭니다. 사실 유전자 조작 종자는 어느 단 하나의 회사가 명확하게 지배하고 있습니다. 몬산토입니다. 그 가격이 너무 비싸 농민들을 빚의 구렁텅이에 몰아넣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생태농업은 근대 기술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땅심을 높이고, 작물을 재배하는 데 필요한 투입 자재를 현지에서 생산하며, 농민들이 개발한 최선의 기술을 채택하는 것을 뜻합니다. 게다가 이러한 기술의 모두가 꽤 생산성을 높인다고 입증되고 있습니다. 실험실에서 과학적으로 개발하고, 그러고 나서 이 과학을 농민들의 견해나 실수요를 고려하지 않고 위에서부터 내려주는 것은 잘못된 접근입니다. 더 투명하고 민주적·공개적으로 의사를 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공공의 의사 형성도 기업의 이익에 영향을 받을 수 없습니다.”



사투의 개막


드 슈터는 국제회의에서 말한다.


“현재 식량 증산을 위한 토지 파악의 많은 예나 개량 품종, 화학비료와 농기계와 녹색혁명 모델을 위해 대규모 투자의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토양이나 물, 기후를 보호해 나아가고, 식량 생산과 농민 소득을 개선하는 것이 보이고 있는 생태농업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이 혹성에서 10억 명 이상이 굶주리고 있고 기후 분열이 눈앞인 상황에서, 우리는 빨리 이런 지속가능한 기술을 퍼트려야 합니다. 세계 규모의 굶주림, 기후변동, 그리고 천연자원의 고갈에 한번에 대처하는 방책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빠진 것은 헛수고로 끝나겠지요.”


드 슈터가 생태농업을 평가하는 배경에는 영국 에식스essex대학의 줄스 프리티Jules Pretty가 행한 개발도상 지역의 57개국에서 3700만ha에 달하는 286프로젝트의 조사가 있다.


“에식스대학의 줄스 프리티가 행한 연구에서는, 생태농업적 접근으로 전환하면 평균 79% 수확량이 증가했다고 결론짓고 있습니다. 그것은 믿을 수 없는 결과입니다.”


드 슈터는 생태농업의 성공의 구체적 예는 아프리카에 많다고 하며 그 사례를 들었다. 탄자니아에서 신양가Shinyanga주州의 서부와 타보라Tabora는 ‘탄자니아의 사막’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어그로포레스리라고 참가 모델의 공정을 써서, 약 35만ha의 토지가 20년 걸려 부활했다. 1세대에 수익은 연간 500달러나 올랐다. 같은 기술은 말라위Malaw에서도 쓰여, 2005년에는 약 10만의 소농이 비료를 가져오는 수목의 은혜를 얻고 있다고 한다.


자, 마찬가지로 생태농업을 높이 평가하고 유전자 조작 기술에 의문을 던진 "농업과학기술 국제 평가"에 대해 하버드대학의 농업정책 전문가 로버트 팔버그Robert Paarlberg 교수가 ‘아시아에서 수억 명이나 공복과 기아에서 해방시킨 녹색혁명을, 승리가 아니라 마치 비극이었단 듯이 믿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쓰여져 있는 것처럼 읽을 수 있다’라고 불평하며, 아프리카의 빈곤과 기아는 생명공학을 활용하지 않은 결과라고 주장한 것은 나의 책 "지구를 구할 신세기 농업"에서도 썼다(158쪽).


도대체 드 슈터 박사와 팔버그 교수 가운데 누구의 견해가 옳을까? 거기에는 개발도상국의 정보가 유용하다. 예를 들면 「제3세계의 저항」이란 잡지를 인터넷에서 읽으면 같은 교수가 이런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빌&메린다 게이츠 재단은, 아프리카에서 유전자 작물의 연구 개발에 많은 금액을 투자하고 있다. 그것을 받아들인 정치 상황을 만들고자 하버드대학의 로버트 팔버그 교수를 고용하였다.”


미국 같은 위대한 민주주의 선진국이 사용한 언어다. 이러한 교수의 행동을 잘 형용하는 영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 같은 후진국에는 딱 알맞은 말이 있다. ‘어용학자’이다.


한편 드 슈터는 세계에서 가장 저명한 25명의 생태농업 전문가를 브뤼셀에 모았다. 그리고 전문가들은 2050년에 세계를 기르는 데 필요한 생태농업적 접근의 정책을 특정했다. 잘도 모았다. 하지만 전문가들이 근거로 했던 프로젝트의 이름을 들으면, 빌 게이츠라 하더라도 흔들리지 않을까?


생태농업 정책을 지닌 쿠바, 그리고 생태농업 훈련 계획을 운영하는 국제 소농 운동, 비아 깜페시나의 일이다.


드 슈터는 말한다.


“우리는 이러한 지속가능한 농업 모델을 확대하고, 가장 가난한 농민들을 위해 확실하게 기능하도록 할 것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성공한 파일럿 프로젝트를 국가 정책에까지 움직이는 정치적 의사입니다.”


쿠바, 비아 깜페시나, 줄스 프리티. 모두 나에게는 매우 친숙한 주제뿐이다. 생태농업은 어디까지나 ‘학學’이다. 하지만 생태가 ‘학學’에서 떨어져 정치운동이 된 것처럼, 생태농업도 국제회의의 장에서 불꽃을 터트리고 있다. 빌 게이츠와 미국 VS 비아 깜페시나와 쿠바 연합군. 여기에 국제연합 고문도 연결되어 얽히어 셋 사이의 사투가 펼쳐진다면, 싸움의 귀추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구경꾼 근성으로는 이후의 전개가 즐길 만한 일임이 틀림없다.

 

 

 

written by 요시다 타로, translated by 김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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