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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순천의 시장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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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본격적으로 책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다카하시가 경기도부터 조사했지만 책은 전라도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순서에 따라 전라도 조사 기록을 보고, 앞으로 남은 두 번 동안은 경상도와 충청도, 제주도의 조사 기록을 소개하겠습니다. 지면이 한정되어 있으니 잡다한 말은 줄이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순천 사는 황귀연 씨

먼저 다카하시가 1939년 2월 26일에 방문한 전라남도 순천군 순천읍 풍덕리(豊德里)를 찾아갔습니다. 이곳은 지금은 순천시 풍덕동이 되었습니다. 순천역에서 조금만 걸으면 도착합니다. 예전에는 논밭이었을 곳이 지금은 도심지가 되었지요. 그때 당시 이 마을은 모두 61호가 살았는데, 그 가운데 농업은 47호(자작 10호, 자소작 10호, 소작 27호), 날품 파는 가구 13호와 담배 말리는 곳이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우물이 네 군데 있고, 소는 11마리가 있었다고 하네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의 모습입니다. 농사짓는 규모는 대농은 논 37~40마지기와 밭 5마지기 정도, 소농은 논 2~3마지기만 지었다고 합니다.
다카하시가 방문하여 조사한 농민은 32살의 황귀연(黃貴連)이라는 사람입니다. 부모님과 아이들, 동생들 모두 10여명이 함께 사는 대가족입니다. 그래도 일본에 가서 돈을 버는 동생도 있고 역무원을 하는 동생도 있어 그리 형편이 어려운 집은 아닙니다. 앞으로도 보시겠지만 대부분의 조사 농가는 어느 정도 사는 집들입니다. 조사하기 편한 점도 있을 테고, 그 지역 공무원들이 섭외하기도 좋아서 그랬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농사짓는 곳은 모두 아홉 군데입니다. 그 가운데 몇 가지 특징적인 것만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집 앞에 있는 두 배미짜리 800평 논입니다. 이곳의 소작료는 6/10이고, 볏짚은 소작인이 갖는다고 합니다. 수확량은 1936년도에 '은방주'(銀坊主)로 나락 10섬, 1937년에는 나락 6섬을 했습니다. 은방주라는 품종은 일본 도야마현(富山縣)에서 1922년에 들여온 품종으로 까락이 없고 수확량이 많으며, 적당한 크기라서 잘 쓰러지지 않고 병에 강하며 척박한 곳에서도 잘 자랐다고 합니다. 이것 말고 都摸떡不이라는 품종을 흔히 토종으로 아시지만 이것도 일본에서 들여온 품종입니다. 아무튼 이 논에 모내기할 때는 1평에 18~21㎝ 사이로 모두 86그루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뒷갈이로는 쌀보리를 하고, 왕골도 1평 심어서 소의 고삐 29m 정도 만들고, 풋거름 작물로 자운영도 5평 심었다고 합니다.
다음 남지종 앞밭이라는 곳입니다. 남지종은 뭔지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자기한테 들리는 소리를 일본어로 적어놓아서 그걸 다시 우리말로 푸는 작업이 가장 힘듭니다. 사투리도 많고 처음 듣는 낱말도 많아서 더욱 그렇습니다. 이 밭은 280평으로 집에서 1308m 떨어져 있는데, 소작료로 정조(定租)1)

1) 소작 계약 때 미리 일정한 수량을 정하고 수확한 뒤 분배하는 소작 관행. 일제시대 소작료는 보통 40~60%였는데, 세금만은 지주와 소작인 혼자서 또는 둘이 함께 부담했다. 소작인은 생산물을 자유롭게 거두어들이고 가공할 수 있었지만 소작료는 지주가 지정한 장소까지 기일 안에 날라다 놔야 했다.

 나락  한 섬을 낸다고 합니다. 가을에 쌀보리를 심어 거두고 나서는 그루갈이로 콩 140평, 사이짓기로 목화 140평을 심고, 가을에는 집에서 먹을 김장거리로 무와 배추를 조금 심습니다. 보리 사이짓기 목화는 가을에 보리를 골에 뿌려서 기르다가 목화를 심을 때가 되면 비어 있는 두둑에다 목화씨를 심는 방식입니다. 또한 이 사람은 콩을 심었던 곳에는 다음해에는 목화를 심고, 목화를 심었던 곳에는 콩을 돌려가며 심는다고 합니다.

 

황귀연 씨의 논농사

이 사람이 농사짓던 방법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중오종이라는 440평의 논에 벼를 기르는 방법입니다. 앞갈이 쌀보리를 음력 5월 5일에 거두고 그 다음날 쟁기질합니다. 쟁기질은 자기가 한나절 걸려 하는데, 삽과 쇠스랑 한개도 필요합니다. 그렇게 쟁기질한 뒤에는 써립니다. 쟁기질하는 방법은 두그루짓기하는 땅일 경우에는 '바타갈이(batagari)'를 한다고 합니다. 다른 말로는 '타리갈이(tarigari)', '익갈이(ikkari)'라고도 합니다. 아래 그림처럼 보리 두둑을 부수는 갈이법입니다.


음력 4월 15일부터는 혼자서 이틀에 걸쳐 거름 20지게를 날랐습니다. 음력 5월 8~9일쯤에는 놉을 한 명 사서 1시간 반에 걸쳐 거름을 뿌리고 나서 물을 대고, 3시간 동안 써레질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논을 준비하고는 음력 5월 13일쯤에 모내기를 했습니다. 이 사람은 모내기를 보통 음력 5월 8일부터 시작하여 5월 20일쯤에 끝낸다고 합니다. 모내기를 하려면 모를 쪄야 하는데 이 일에는 아내와 제수씨가 아침 먹기 전에 못자리에 나가 4시간 걸려 끝내놓으면, 자기와 동생이 논까지 2시간 반 걸려서 옮겨 놓습니다. 이날 아침에는 1시간 정도 걸려서 논두렁에 풀도 싹 깎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아들 둘이 못줄을 띄고, 일꾼 한 사람이 더 붙어서  점심 때 50분 쉬고 오후 5시에 모내기를 끝냅니다. 모는 한 그루에 6~7포기를 꽂고, 1평에 18~24㎝ 사이로 64그루를 심었습니다.


그러고 나면 이제 김매기에 들어갑니다. 애벌매기는 모내고 15일째이니 음력 5월 28일쯤 혼자서 손으로 한나절에 끝냅니다. 두벌매기는 5일 뒤인 음력 6월  3일쯤 자신과 남자 놉 한 명이 오전 오후에 3시간씩 하고, 세벌매기는 그 일주일 뒤에 자기 혼자서 손으로 하루 반 걸려 합니다. 보통은 세벌매기를 하는데, 일찍 심은 집은 네벌까지 매는 경우도 있고 늦게 심은 집은 두벌매기만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음력 8월 5일에 이삭이 누렇게 되기 시작할 때쯤에는 피사리를 시작해 자기 혼자서 3시간에 걸쳐 모두 두 번 정도 한다고 합니다.

음력 8월 23일에는 벼를 거둡니다. 보통은 음력 8월 25일에서 음력 9월 10일 사이에 거둔다고 합니다. 자기하고 놉이 아침 먹고 나서 오후 4시까지 벼베기를 한 뒤, 그대로 땅에다 펼쳐서 말립니다. 3일 뒤에는 작은 단으로 묶는데, 이 일은 아내와 제수씨가 이틀에 걸쳐 묶어서 쌓아 놓습니다. 이 마을에서 볏단을 쌓는 방법은 위의 그림과 같습니다.
이렇게 쌓아 놓은 볏단은 자기하고 맏아들이 지게로 집에 날라다 쌓습니다. 한 지게에는 15단을 지는데, 55㎏정도 입니다. 지난 해에는 1단에서 나락 1되 5홉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걸 마당에다가 쌓습니다. 그것을 ‘비늘가리’라고 하는데, 비늘처럼 쌓는다는 뜻입니다. 보통은 그냥 줄여서 ‘비늘’이라고 합니다.

3일 뒤에는 마당질합니다. 이때는 온 가족이 모두 나와 일합니다. 아내, 어머니, 동생, 제수씨, 역무원 동생, 둘째 제수씨 여섯이 저녁까지 나락을 떱니다. 키로 날려 고르기는 자신과 남자 놉 두 사람이 3시간 걸려 마칩니다. 그 결과 나락 3섬 7말 5되에 쭉정이 3말을 얻었습니다. 이걸 방아 찧으려면 방앗간에 가서 값을 치르고 합니다. 나락 1섬을 찧으면 흰쌀 4말 5되가 나오는데, 거기에서 1되 2홉 5작을 냅니다. 그리고 왕겨는 3말, 쌀겨는 1말 정도 나옵니다. 나락 1섬의 값은 16원이고, 거름을 만드는 왕겨는 5말들이 1가마니에 4~6전, 소에게 먹이는 쌀겨는 1말에 10전입니다. 흰쌀은 1말에 3원 20전합니다.

 

남원 사는 박학규 씨

다음은 39년 10월 16일에 방문한 남원군 왕치면 식정리에 사는 68살의 박학규(朴鶴奎)씨의 밭농사를 조금만 보겠습니다. 이 집은 마을에서 중산층이라고 합니다. 암소 1마리에 닭 6마리를 키우고, 겨울에 가마니 120장을 쳐서 30원의 수입을 냅니다. 집은 150평에 구들을 놓은 방이 있는 건물 3채(1채 2칸, 1채 1칸, 1채는 곳간 외양간)가 있고, 마당은 멍석 6장쯤 깔 수 있는 20평 정도라고 합니다.

길고평이라는 719평의 밭은 5년 전에 군에서 알선하여 금융조합에서 싼 이자로 돈을 빌려서 샀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주로 보리를 심는데, 여기에 사이짓기로 목화를 기릅니다. 당시에는 목화가 지금의 고추처럼 환금작물이라서 많이 지었다고 합니다.
보리는 1.2m 하는 ‘왕골’을 만들어서 심습니다. 넓은 두둑을 만드는 이유는 앞에서처럼 골에 보리를 뿌리고 두둑에 목화를 심기 위해서 입니다. 그렇게 두둑과 골을 만들어 심는 일을 ‘작골’이라 하고, 골에 자라는 보리를 ‘골보리’라고 불렀습니다.
이 밭에는 보리를 6되 뿌리는데, 최고 수확량은 1섬 2말이었고 올해는 최저라서 5말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목화는 1말 5되를 뿌려서 지난해에 최고 210㎏을, 올해는 최저 90㎏을 땄습니다.

다음은 중고평이라는 341평 밭입니다. 이 밭은 자작하는 곳이고, 토질은 중등이라고 합니다. 20년 전에 60원에 샀는데 지금은 100원 정도한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반은 뽕나무 200그루를 심었습니다. 나머지 반에는 감자를 조금 심고, 남새와 삼을 기르다가 가을에는 무 2/3, 배추 1/3을 심습니다. 삼은 올해 가뭄이 심해서 거친 삼 30단을 거뒀는데, 좋을 때는 45단까지 거둡니다. 삼은 1단에 45~50전 합니다. 삼 껍질은 마을에서 공동으로 하기 때문에 껍질 벗기는 데에는 품삯이 들지 않습니다. 삼베 1필을 짜는 데 보통 5~6단의 거친 삼이 든다고 합니다. 삼베 1필은 상등품은 10~15원, 중등품은 6~7원, 하등품은 4원 정도입니다.

마늘은 논두렁 등에 조금 심고, 고추는 배추 무 밭에 한 두둑을 심습니다. 지금과는 달리 당시에는 마늘, 고추 같은 양념은 집에서 먹을 것만 저마다 심고, 주로 곡물을 심었습니다.  돈이 되는 작물은 담배나 목화 등이었습니다. 논두렁에는 콩을 1되 심어서 7되를 거둬 콩나물을 만들어 먹습니다.

10월 17일에 묵었다는 보성관(寶城館)의 상차림을 보면서 글을 마치겠습니다.
지금도 보성역 근처 식당에 들어가서 백반을 시키면 받아볼 수 있는 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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