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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1



대담   유라시아의 풍토와 농경


사사키 타카아키佐々木高明

사토 요우이치로佐藤洋一郞




풍토와 농경


사토; 오늘은 많은 사람이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사키 선생에게도 참석해 주셔서 매우 고맙습니다.

시간이 없기 때문에 빨리 시작하겠습니다. 우리의 연구 프로젝트에서는 농업이란 것을 다시 한번 근본에서부터 생각해보자는 큰 주제의 하나로 삼고 있습니다. 1만 년 동안의 농업과 환경이란 것이 지금까지 인류에게 본질적으로 어떤 것으로 이어져 왔을까? 그것을 생각함으로써 앞으로 미래의 농업의 자세,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방법을 생각하기 위한 대비를 하고 싶다. 즉, 후속세대의 농업을 어떤 방법으로 하면 좋을지를 고안하고 싶다고 생각하여 좀 역설적인 주제를 내세운 연구 프로젝트를 마련했습니다. 그것이 '농업이 환경을 파괴할 때'라는 주제이고……


사사키; 매우 선풍적이네요.


사토; 원죄론이란 사고방식이 있어서 대저 농업은 인류에게 나쁜 것이란 사고방식이 있지만, 그렇게 말해 버리면 너무 노골적이라 맛도 정취도 없기에…… 아까 이야기에서는 없었지만 뭐가 어떻게 되면 맛이 없을까, 뒤집어 생각하면 무엇을 어떻게 놔두면 환경과 어느 정도 조화를 꾀할 수 있고, 또는 잘 해내지 않을까 하는 걸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세계의 …… 라고 하더라도 아프리카와 신대륙까지를 포함하여 의론할 만한 힘도 시간도 지금은 없기 때문에, 우선 유라시아에만 주목하여 이야기를 진행하려 생각합니다.


사사키; 일본의 농경을 생각만 해도 유라시아, 즉 유럽부터 아시아에 걸친 대륙과 그 남쪽에 있는 여러 도서의 전체를 시야에 넣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지역의 1만 년 정도의 역사를 배경으로 고려하면서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는, 더구나 미래는 어떻게 내다볼지가 이 <유라시아 농경사> 전체의 문제 같네요. 따라서 오늘은 조금 큰 시야부터 유라시아의 농경사, 농경문화사 같은 전체적 문제를, 프로젝트의 지도자인 귀하를 상대로 하여 생각해 나아가도록 하겠네요.


사토; 그러합니다. 그래서 이야기의 시작으로, 한 장의 지도를 제시하려고 합니다.



사사키; 유라시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지도네요. 간단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사토; 이것은 독일의 기후학자 W. 쾨펜(1846-1940)이 고안한 '기후 구분도' 등을 바탕으로 작성한 지도입니다. 이 유라시아의 기후도에 와츠지 데츠로(1889-1960)의 <풍토 -인간학의 고찰>에서 문제삼는 세 가지 '풍토'를 기재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일본의 남쪽 반부터 중국의 남부, 동남아시아의 대륙부를 지나서 인도의 동부에 걸친 지역이 '계절풍 풍토'. 그 다음에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 즉 유럽을 포함한 지역이 와츠지의 말을 빌리면 '목장의 풍토'. 그 다음 그 한가운데에 있는 것이 '사막의 풍토'. 이 세 가지 정도를 무대로 하여 농경이란 것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사사키; 어쨌든 농경이란 건 기본적으로 식물을 재배하는 것이기에 자연조건의 특색을 배경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는 기후조건을 고려하는 것이 유라시아의 농경을 생각할 때 대략적인 틀 짜기가 되기에 이 그림이 이번 토론에서는 기본적인 지도라 생각하는 게 좋습니다. 지금 말씀드렸듯이 쾨펜이라든지 누구든지 좋습니다만, 기후 구분이란 건 전체적으로 추운 곳, 따뜻한 곳, 더운 곳이란 온도 조건과 비가 많은 습윤한 곳과 건조한 곳이란 건습 조건(기타 강수 계절도 있지만) 두 가지를 조합하여 생각합니다.

한편, 와츠지 데츠로라는 철학자가 1927년에 유럽으로 유학을 갔을 때는 배로 쭉 프랑스의 마르세이유까지 갔습니다. 그 길에 인도양과 인도에서는 혹서로,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공기가 매우 건조하다. 그 다음에 유럽에 도착하면 지중해 연안은 매우 환하다. 그렇지만 독일에 가면 그곳은 아주 음울하고, 숲의 세계이다. 그와 같은 인상을 바탕으로 '풍토'라는 개념을 고안했다. 그리고 그 '풍토'가 인간의 존재든지, 문명이든지에 주는 영향을 몸으로 직접 느끼게 되었죠. 그 인상을 바탕으로 <풍토>라는 책을 쓴 것이죠. 위의 지도는 그러한 와츠지 씨의 생각을 배경으로 하면서, 이러한 모습을 크게 나누어 본 것이죠.

그래서 사토 씨, 문제는 지도 안의 굵은 선인데 이건 무엇입니까?


사토; 지도에서 일본 열도의 중앙부부터 중국을 통하여 히말라야 남단을 서쪽으로 이어진 굵은 선 말입니까? 그건 보리의 품종을 구분하는 선입니다. 보리의 이삭을 보십시오(그림4-1). 이건 옛날부터 유라시아에 있는 작물입니다. 보리는 그림의 가장 왼쪽 끝에 있습니다만, 이들을 대학원생에게 그 이름을 말해 보라고 하면 재밌어요. 반 정도는 틀립니다.



그림4-1 유라시아의 주요 곡물. 오른쪽부터 벼, 조, 피, 향모, 기장, 수수, 밀, 보리.



사사키; 요즘 농학부 학생은 반도 모를 거예요. (웃음)


사토; 반 이상 모를 거예요. (웃음) 가장 왼쪽이 밀이고, 오른쪽이 보리입니다. 타카하시 류헤이高橋隆平(1912-1999)라는 선생이 말씀하셨는데, 당시의 말로 '동아시아형' 보리와 '서구형' 보리 두 종류가 있다는 유명한 논문을 1955년에 발표했습니다.


사사키; 오카야마 대학의 선생이셨죠. 확실히 보리의 탈립성을 방지하는 유전자 조합의 연구에서 세계의 보리 품종에 서쪽(W)형과 동쪽(E)형이 있다고 기술되었죠.


사토; 그러한 것을 말하고 계십니다. 여러 보리 품종의 유전적 성질을 조사하면, 몇 가지 성질과 그 유전자의 분포에 지리적인 특이성이 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E형의 품종군에만 있는 유전자가 몇 가지 있다고 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찰보리라든지 쌀보리라든지……


사사키; 쌀보리라는 건 보리의 껍집이 잘 떨어지는 것이죠.


사토; 그렇습니다. 반대의 성질인 겉보리에서 종자는 풀 같은 물질로 '겉껍질'에 달라붙어 있는데, 쌀보리에서는 성숙기에 이 풀의 힘이 약해져 종자가 '겉껍질' 안에서 벗겨지듯 떨어집니다. 그래서 익은 이삭을 떨면 버석버석 소리가 나지요. '미숫가루'라든지 '보릿가루'로 쓰는 것이 쌀보리, 보리차로 쓰는 것이 겉보리입니다. 우선 굵은 선의 남동쪽에도 쌀보리 외에 겉보리와 메보리도 존재한다는 걸 주의하세요.


사사키; 유라시아 대륙의 쭉 서쪽부터 북쪽에 걸쳐서가 'W형 보리'의 분포 지역이고, 그 선보다 동쪽이 대략 'E형 보리'가 분포하는 지역이며, 이 선이 계절풍 지역과 건조 지역을 나누고 있는 선에 약간 가까운……


사토; 아뇨, 약간 가깝다기보다는 매우 잘 맞습니다. 잘 찾아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잘 맞습니다. 


사사키; 요컨대 계절풍 지대는 기후가 온난하고 여름에 자주 비가 내리지요. 지도에서는 연간 강수량 400mm 선이 그려져 있네요. 이 400mm 선의 안쪽, 즉 강수량이 그 이하인 지역이 와츠지 씨 식으로 말하면 '사막의 풍토'입니다. 다만 이 지역 전부가 사막은 아니고, 반건조의 초원 지대도 꽤 넓죠. 맥류의 원산지도 이 안에 포함되어 있지요.


사토; 네, 대개 들어 있습니다. 보리와 밀의 원산지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라고 부르는 지대로, 이 지도에서는 카스피해의 남부에서 서쪽의 400mm 선을 따라서 겹쳐져 있습니다. 밀 가운데 '보통 밀'이라 부르는 우리가 지금 빵과 라면으로 먹는 밀에 대해서는 여기보다 약간 동쪽, 아나톨리아부터 카스피해의 남안에 해당한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사사키; 400mm 선보다도 서쪽의 '목장의 풍토', 즉 지중해 연안의 지대는 어느 쪽이냐고 한다면 나무가 드문 지대이고, 거기부터 알프스를 넘어 북쪽은 일반적으로는 산림 지대, 구체적으로는 졸참나무와 너도밤나무를 주체로 하는 낙엽광엽수림이네요. 이 산림대는 쭉 유라시아의 북쪽부터 동북아시아까지 뻗어 있지요.


사토; 유라시아의 쭉 북쪽을 타고 그 낙엽광엽수림대는 옛 만주(중국 동북부)와 조선반도 북부를 거쳐 일본 열도의 동북부까지 닿아 있습니다.


사사키; 대충 그렇게 큰 범위 안에서 와츠지 씨가 전혀 문제 삼지 않은 건 동남아시아 섬들의 세계. 와츠지 씨는 그곳에는 가 보지 않았다. 유럽으로 배로 유학을 갈 때 여기는 들르지 않았다.


사토; 아뇨, 들렀죠.


사사키; 뭐, 싱가포르 정도는 들렀을지 모르지만, 섬에는 가지 않았다. 지구연(종합지구환경학연구소)의 타치모토立本 소장 등이 조사한 인도네시아 등은 간 적이 없다. (웃음)


사토; 옆은 스쳐 갔을지도요. (웃음)



종자번식과 영양번식


사사키; 그런데 지도에는 동남아시아 대륙부터 도서부에 걸쳐서 큰 원이 있으며 여기에 '뿌리작물 농경의 풍토'라고 적혀 있고, 그 옆으로 '종자번식'과 '영양번식'이란 굵은 녹색의 화살표 사선이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조금 설명해 주세요. 


사토; 이건 최근 내가 고안한 축입니다. 갖가지 재배식물이 어디에서 생겼는지 조사해 보면 맥류가 생긴 곳, 맥류는 완전히 한해살이인데 대부분은 가을에 그 종자를 뿌린다. 매우 추운 곳에서는 봄에 종자를 뿌리는 곳도 있습니다. 그렇게 봄에 뿌리면 가을에, 가을에 뿌리면 봄에 꽃이 피어서 종자를 얻을 수 있다. 종자를 얻으면 부모인 식물은 완전히 죽습니다. 맥류만이 아니라 잡곡류의 대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식물을 한해살이 식물이라 부르는데, 이런 식물이 생긴 곳이 유라시아에서는 지도의 왼쪽 윗부분입니다. 


사사키; 위라고 하기보다는 한가운데 왼쪽 부근. '사막'이라는 문자 위에 해당하네요. 그런데 일본어는 편리하여 맥류라 하면 보리도 밀도 모두 포함하지만, 영어 등의 서구어에서는 맥류란 단어는 없지요(표4-1).




잡곡에 관한 이름의 분화

맥류에 관한 이름의 분화

잡곡 농경문화

벼, 조, 수수, 기장, 피 등 종류마다 한자로 표시하는 개별 이름이 있고, 총칭하는 명사가 없다.

맥류란 총칭 명사만 있고, 개별 종류에는 대, 소, 연 등의 형용사를 붙여서 구별한다.

맥류 농경문화

millet이란 총칭 명사만 있고, 개별 종류에는 여우꼬리, 보통, 손가락, 농가 마당 등의 형용사를 붙여서 구별한다.

보리, 밀, 귀리, 호밀 등 종류마다 개별 명칭이 있고, 맥류에 해당하는 총칭 면사가 없다. 

표4-1 잡곡 문화와 맥류 문화에서 작물 이름의 분화. 잡곡 농경문화권의 언어를 중국어, 맥류 농경문화권의 언어를 영어로 대표하여 대비했다.



사토; 없지요. 그런데 최근 저는 무리하게 맥류라고 말하거나 적어 보는데, 이것이 제법 외국인에게 받아들여지네요. (웃음)


사사키; 원래 서구어에는 밀이라든지 보리라든지 호밀이라든지 귀리 등 각각의 개별 식물 이름이 있고, 맥류라는 총칭 명사는 없다.


사토; 그 반대의 입장에 있는 것이 잡곡이네요. 일본어에서는 피, 기장, 조 등 정확하게 개별 이름이 있는데, 영어 등에서는 개별 이름이 아니라 '밀렛'이라 총칭한다.


사사키; 지금 '맥류'의 산지라고 하는 곳은 밀도 보리도 포함하고 있지요.


사토; 그렇습니다. 아마 귀리 등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사사키; 과연. 그들은 모두 한해살이이고. 


사토; 종자로 증식한다. 그래서 한해살이라면 부모가 죽어 버린다. 그러한 종류이지요. 그런데 오른쪽 아래의 동남아시아 쪽을 보면……


사사키; 영양번식 식물의 세계이다.


사토; 그렇습니다.


사사키; 영양번식이란 건 어떤 것?


사토; 종자가 아니고 뿌리 나눔이나 포기 나눔 등으로 증식하는 겁니다.


사사키 ; 뿌리 나눔이라든지 포기 나눔이네요. 경우에 따라서는 접붙임 같은 것이네요.


사토; 접붙이기나 꺾꽂이 같은 겁니다. 꽃을 피워서 다음 세대를 만드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 그와 같은 식물입니다.


사사키; 종자가 없는 건?


사토; 종자가 없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용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종자를 만들지 않는다. 혹은 종자는 이용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한 것이지요. 전형적인 것으로는 토란이라든지 참마(그림4-3), 바나나 등입니다.



토란의 다양한 형태. A: 기는 줄기를 가진 야생형. B: 열대에서 많이 재배되는 어미토란형. C: 동아시아 온대권에 많은 새끼토란형.



통가의 참마 A-H: Dioscorea alata. I: D. pentaphylla. J: D. nummularia K: D. euculenta


그림4-3 대표적인 영양번식 식물 <덩이뿌리와 인간(イモとヒト) -인류의 생존을 뒷받침한 뿌리식물 농경>에서




사사키; 바나나는 전형적인 영양번식 식물이라 하겠네요. 바나나는 과실 안에 종자의 흔적이 있긴 하지만, 종자로는 번식하지 않고 포기 나눔으로 대를 늘려 간다.


사토; 그렇네요. 일반적으로 영양번식 작물을 '뿌리 재배 작물'이라 합니다만, 이용하는 부분은 다르다. 어느 쪽이든 뿌리 나눔이나 포기 나눔 등으로 증식하는 것이 '영양번식' 식물입니다. 그래서 이들 작물의 선조종의 존재는 필시 남쪽 섬들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사사키; 요컨대 '영양번식'이란 연중 고온이고 다습한 열대 산림의 자연을 배경으로 한 번식의 양식이죠. 


사토; 어지간하면 계절풍 지대와 열대 아시아 섬들의 토지에서는 무엇인가 식물이 살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곳에서 작은 종자가 탁 떨어지거나, 사람이 그것을 뿌리거나 해도 좀처럼 살아 남지 못하지요.


사사키; 그러니까 그러한 곳에서는 종자번식과 다른 영양번식 식물을 주체로 한 '뿌리작물 농경'이 발달했다는 것이네요. 그에 대해서는 또 나중에 문제로 삼고 싶습니다.

어쨌든 건조 지대를 중심으로 하는 종자번식의 농경에서는 주작물로 맥류와 잡곡과 콩류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하여 뿌리작물 농경에서는 토란과 참마와 바나나와 사탕수수와 빵나무 등이 대표적인 작물로 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계절풍 지대는 어느 농경 유형에 속하는 겁니까? 결론부터 말하면 벼가 많은 곳은 계절풍 지대이지요. 벼라는 식물은 어느쪽입니까?


사토; 이것은 재미난 문제이네요. 둘 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르다는 사람도 있겠지요. 벼라는 건 옛날부터 말하듯이 자포니카와 인디카라는 두 가지 집단이 있지요. 자포니카라는 장강 유역에서 발생한 유형의 벼는 작물로는 한해살이입니다. 그러나 선생은 알고 계신다고 생각하는데, 가을에 벼베기를 하면 밑동에서 '움돋이'가 생기지요. 그 움돋이에 바로 몇 센치미터 정도의 이삭이 생길 수 있습니다(그림4-4). 



그림4-4 움돋이



사사키; 예를 들면, 타네가시마 등에서는 움돋이를 '힛쯔'라 부르고, 예전에는 그것을 키워서 움돋이의 종자를 수확했습니다. 그러한 사실도 있기에 벼라는 건 원래 여러해살이의 성질을 가지고 있었겠지요.


사토; 자포니카 벼는 여러해살이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지금도 가지고 있을 겁니다. 또 하나의 집단은 인디카인데, 자포니카 등에 비하여 움돋이가 나오는 게 좀 적다. 더욱이 거기에 이삭이 나오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결국 인디카라는 벼는 한해살이에 가깝다. 그래서 지도의 녹색 선 위로 가면, 뿌리작물 농경의 풍토에 더 가까운 곳의 자포니카는 약간 여러해살이의 성질을 가진다.


사사키; 이 지도에서 말하면, 계절풍의 풍이란 글자 근처의 둥그런 부분인데 그에 해당하는, 즉 장강 중하류가 자포니카의 기원지라고 사토 씨는 생각하고 있지요.


사토; 네.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사키; 벼란 작물은 아시아의 계절풍 지대, 즉 인도 아대륙부터 중국 대륙, 일본 열도, 동남아시아까지 오늘날에는 널리 재배되고 있지만, 어느 쪽이냐 하면 자포니카는 원래 영양번식을 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에 대하여 인도에서 그 뒤에 재배된 인디카는 자포니카에서 나왔다는 가설을 사토 씨는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 인디카는 자포니카에 견주어 영양번식을 하는 성질이 꽤 적다는 것이네요.


사토; '자포니카에서 나왔다'란 것은 아니고, 자포니카의 유전자를 '획득한다'는 겁니다.


사사키; 어렵네요…… '유전자를 획득한다'라는 표현을 한다면, 일반인은 이해하기 어렵네요. (웃음) 여하튼 자포니카란 벼는 원래 영양번식의 성질이 있다. 그러나 벼로 먹고 있는 건 종자를 먹는 것이고, 지금 우리는 자포니카의 종자를 심어서 재배하며, 포기 나눔으로 증식하거나 하지 않는다. 왜 원래 영양번식의 성질을 지닌 자포니카가 종자번식으로 바뀐 것입니까? 벼농사 기원론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그점은 어떻습니까?


사토; 그것이 아직 잘 모르는 부분인데, 하나의 가설로 이는 벼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식물에게 공통의 성질이지만 영양번식을 하는 식물이 기후가 나빠진다든지, 건조해진다든지……


사사키; 압박을 받는 거네요.


사토; 그렇습니다. 그러하면 지금까지는 푸르러서 자주 종자를 맺지 않던 식물이 서둘러 종자를 맺게 된다. 이것은 여러 가지 식물에게도 공통입니다. 그럼 자포니카의 벼가 종자번식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냐면, 영거 드라이아스기라고 부르는 시대의 기후 한랭화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으로부터 1만 1천 년 정도 전에 지구는 급격하게 추워졌다. 그러한 시기에 그때까지는 포기 나눔으로 번식을 했던 자포니카의 원시적인 유형이, 영거 드라이아스 한랭기에 이르러서 종자를 맺게 되었다.


사사키; 어쨌든 그러한 모양으로 종자번식을 하게 된 벼가 그 뒤 계절풍 지대에 퍼져 그 주작물이 된 것이네요.


사토; 그리고 그것이 수 천 년을 지나 1만 년 정도 전의 일이죠. 대략 이야기하여 그 정도라고 생각합니다만, 자포니카 유형의 재배 벼가 열대 쪽으로 전파되어 가서 그때에 열대에 있던 야생 벼와 자연교배하여 생긴 것이 인디카였다고 생각합니다. 인디카의 벼는 한해살이인 본래의 야생 벼의 성질을 이어받아 한해살이 풀이 된 것이 아닐까? 요컨대 유라시아 대륙 서부의 건조 지대에 있던 맥류부터 동남의 도서 세계의 뿌리작물 농경권의 영양번식 식물에 이르기까지 깨끗하게 선 위에서 경향이 생겼을 겁니다.



농경과 가축의 결합


사사키; 그렇다면 유라시아의 농경을 크게 나누자면, 서쪽에서는 건조 지대 기원의 맥류를 주작물로 하는 농경이 퍼져서 맥류농사 농경 지대가 되었다. 동쪽은 종자번식을 하는 자포니카 벼를 중심으로 하면서 벼농사가 퍼져, 그 속에서 인도 아대륙에서는 인디카도 생겨나고, 계절풍 지대 전체로서는 벼농사 지대가 되었다.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도서부는 원래 영양번식 식물의 지대로, 바나나와 토란 또는 참마 종류 등을 중심으로 한 뿌리작물 농경이 옛날부터 성립되었다. 큰 배치는 그런 것이네요.


사토; 지도의 한가운데부터 오른쪽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사사키; 다시 한번 이야기로 돌아가, 지도의 왼쪽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와츠지 씨가 이에 대해 '목장의 풍토'라고 했지만, 몇 번 읽어도 감이 오지 않습니다. 다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있지만 와츠지 씨는 '목장'이란 단어로 유럽은 일본과 달리 유축농업이 성행하고, 문화의 여러 측면에서 가축과 강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직접 체험해 그 강한 인상을 기술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독일 북부의 호텔 등에 묵으면 햄과 소세지 등은 정말로 여러 종류가 나오더군요.


사토; 대체로 맛있지요.


사사키; 확실히 유럽의 문화, 그 기초가 되는 서아시아 기원의 맥류 농경문화는 우리처럼 그다지 목축과 관계 없는 민족문화와는 크게 다를 겁니다. 이 맥류를 주작물로 삼는 농경은 밭농사 문화이고, 밭농사만 지으면 양분이 고갈되어 황폐해진다. 그래서 목축과 결합하여 돌려짓기하는 농법이 필요해진다. 중세 독일사에서 유명한 삼포농법이란 건 여름 작물과 겨울 작물의 경지 구역에서 곡물을 재배하고, 휴한지에서 가축을 방목하는 것이지요. 그 휴한지에는 개인 소유의 농지가 있어도 휴한기에는 완전히 공동의 목초지가 된다. 그와 같은 관계에서 공유라는 제도가 유럽 안에서는 나온 것인데, 그러한 휴한 방목, 즉 가축 사육과 결합된 농경이 있는 것이지요.


사토; 가축이라 하는 건 어느 의미에서는 맥류 농경의 시작부터 어른어른 보였다 안 보였다 하지요.


사사키; 어른어른이라기보다 염소와 양은 맥류 농경의 기원 단계부터 확실히 나타납니다. 이 농경은 시작부터 가축과 결합된 것이 특색이라 생각합니다. 맥류를 재배화하는 것과 그 초원에서 무리로 이동하는 동물(양, 염소)를 가축화하는 것이 병행하여 진행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토; 그렇네요. 어느 쪽이 빠른지는 의론이 있겠지만, 저도 그것은 완전히 병행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맥류 농경이란 건 주로 양과 염소를 중심으로 하는 목축이 시작되는 것과 병행하여 시작했다.


사사키; 그 다음에 나중에 소가 가축화되어 맥류농사 농경에 더해집니다. 어느 쪽이든 이들 가축은 모두 무리 동물이란 것이 특징이지요. 유명한 <농업의 기원>을 쓴 C. O. 사우어Sauer(1889-1975)라는 지리학자가 있는데, 세계의 가축을 두 종류로 나누어 무리 동물과 가축으로 분류했습니다. 가축, 즉 마을 안의 각 세대에서 사육하는 가축의 전형이 돼지와 닭 등입니다. 그에 반해 무리 동물은 주로 초원에서 가축군으로 방목의 형태로 사육하는 발굽 동물로, 건조지대의 초원에 결합됩니다.

돼지를 대표로 하는 가축은 어느 쪽이냐 하면 산림 지대에 결합된다. 유럽의 북쪽은 산림 지대이기에 돼지 사육이 성행하고, 그 산림대가 아까 이야기했듯이 쭉 동쪽까지 연속되어 동북아시아에서도 잡곡과 돼지 사육이 결합된 문화가 나옵니다. 그외에 아시아의 계절풍 지역의 벼농사 지대와 그 남쪽의 열대 산림대의 뿌리작물 농경에 결합되어 있는 것이 가축=돼지 사육입니다. 유라시아의 농업이란 것은 서쪽에서는 양과 염소 등의 무리 동물, 동쪽의 벼농사 지대는 돼지를 주로 한 가축 지대입니다.

또 말하는 걸 잊었는데, 서쪽 건조지대에서는 양과 염소 외에 나중에 소와 말 등의 대형 짐승도 가축화되어 이들 무리 가축의 사육과 밀접하게 결합된 중요한 문화가 젖의 문화입니다. 실은 동쪽 문화에서는 본래 젖의 문화가 빠져 있습니다.


사토; 동과 서의 차이이지요.


사사키; 중국 호남성 장사長沙 근처 소산韶山이란 곳에 모택동 씨의 생가가 있습니다. 조엽수림대입니다. 가서 보면, 모택동 씨가 태어난 집에는 꽤 큰 돼지우리가 있다. (웃음) 역시 저 주변의 벼농사 지대에서는 전통적으로 모두 돼지를 키우고 있습니다(그림4-5).



그림4-5 소산에 있는 전통 농가. 어느 농가에나 큰 돼지우리가 있다.



사토; 동쪽의 벼농사 지대에서는 돼지와 가금류(닭과 집오리 등)이지요. 새도 매우 특징적입니다. 그것과 식물화로는 물고기가 지닌 역할도 참으로 크다고 생각하네요. 벼논양어라는 말이 있는데, 저건 계절풍 아시아의 벼 생산의 장에서는 항상 물고기 -물론 이것은 밀물고기이지만- 를 잡았다. 저는 이것을 '쌀과 물고기의 동소성'이라 쓰고 있습니다만, 이 벼논양어도 조엽수림대부터 남쪽으로 펼쳐진 지역의 특징이라 생각합니다.



논의 시작과 벼농사 문화

 

사사키; 문제는 벼는 앞에서도 논했듯이, 종자번식을 하게 되어 작물로 성립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논에서 재배되었던 것입니까?


사토; 벼의 근간이 된 식물, 적어도 자포니카의 원종에 관한 한은 물이 철벅철벅한 곳이 생육 적지이지요.


사사키; 철벅철벅한 곳에서 재배화되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사토; 아뇨, 단지 그것만으로는 재배화되지 않는다고 저는 생각하네요. 그렇다는 건, 계절풍 지대의 그런 철벅철벅한 곳은 동시에 악어 등의 동물도 있겠죠. 그 다음 말라리아도 있을 것이고, 기타 여러 가지 천적도 있을 겁니다. 인간이 살기 쉬운 곳에는 없겠네요. 벼에게도 경쟁상대가 잔뜩 있을 겁니다.


사사키; 인간이 살기 쉬운 곳이라 하면?


사토; 음. 인간이 살게 된 곳은 좀 더 건조하다. 더구나 그곳에서 계절풍의 역할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물이 있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이 있다는 겁니다. 우기가 되면 물이 모이고, 건기가 되면 빠진다. 그러한 곳은 한해살이 풀밖에 적응할 수 없겠죠. 숲에서는 우기에는 물이 고여서 안 되고, 수생식물에게는 건기에는 강한 건조함 때문에 안 된다. 한해살이 풀만이 지면이 노출되어 있는 곳에서 생육할 수 있는 토지이기에, 아마 그런 곳이 최초의 벼농사가 시작된 곳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즉, 건기의 수위가 조금 오르지요. 그러한 곳이 아닌 한 재배 벼는 기르지 못한다. 역시 늘 습지인 곳은 벼농사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매우 원시적인 것은 별도로 하고, '벼농사 문화'라고 말할 정도의 벼농사는 그러한 곳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사사키; 저는 '벼농사 문화'라고 할 때는 논두렁과 수로를 지닌 정비된 논이 그 기초에 있는 문화라고 생각합니다. 논이란 특유의 생산기반에서 성립하는 논벼농사 농경이라는 것과 논벼농사 농경 이전의 농경은 대단히 성격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논벼농사 농경이란 생산형태가 확립되고, 처음으로 벼농사 사회가 형성되어 벼농사 문화, 벼농사 문명이 나온다. 논벼농사 이전의 농경이란 것은 꽤 원시적인 것으로, 수렵채집 경제와 아직 광범위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사토; 어제까지 채집하던 사람이 오늘부터 갑자기 벼농사를 개시하는 등과 같은 일은 생각할 수 없다고 보지요.


사사키; 이 시리즈의 안에 나카무라 신이치中村慎一 씨(가나자와 대학) 등도 서술한다고 생각하는데, 지금 동아시아의 고고학자 의견이 거의 일치하고 있는 바는 논벼농사 농경이 완성된 건 양저문화 무렵. 기원전 3300년 무렵부터 2200년 무렵까지의 시기라고 말합니다. 상세한 건 여기에서는 생략하지만, 유적과 유물의 상황으로 판단하여 이 무렵이 되면 정비된 논을 지닌 벼농사 농경이 확립하고, 벼농사 문화가 형성되어 지방의 국가도 성립되지 않았나 이야기합니다. 저도 그에 거의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사키; 그렇다면 그 이전의 벼농사는 벼는 농사지었지만 의지하지 않는, 사실 지금까지도 동남아시아에서 조사를 하고 있는데 저는 '원초적 천수답'이라 이름을 붙였습니다만, 벼와 잡곡을 함께 심어서 비가 내린 해에는 벼가 자라지만 비가 적은 해에는 잡곡이 자란다. 밭인지 논인지 알 수 없는 듯한 경지가 많이 있습니다.


사토; 밭과 논이란 명확한 구별은 없었다고 생각하지요. 예전, 미야자키 대학에 계셨던 후지와라 히로시藤原宏志 씨가 강소성 소주시의 좀 동쪽에 있는 초혜산 유적에서 논터를 발견했다고 하여……


사사키; 저, 후지와라 씨가 불러서 그곳에 견학하러 갔습니다.


사토; 아, 가셨습니까? 6200-6300년 전의 유적이지요. 대략 지금의 논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사사키; 정말로 작지요. 제2장 그림2-7과 그림2-8이 그 유적을 보여주고 있는데, 한 구획이 몇 평방미터 정도인 것이 쭉 붙어 있다.


사토; 게다가 움푹하지요.


사사키; 움푹합니다. 그곳이 논 유적이라 하지만, 논이라 좋을지 어떨지 좀 무리일지도 모릅니다. (웃음)


사토; 무리라고 저도 말합니다. (웃음) 그렇지만 이른바 벼잎 세포화석은 나왔지요. 그러니까 후지와라 씨 들은 잎의 세포화석이 나왔기에 이것은 논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벼잎 세포화석의 존재는 다른 생물종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연과 마름 등 벼과 이외의 수생식물에는 잎의 세포화석이 없지요. 잎의 세포화석만으로는 다른 생물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 벼가 벼가 있었다고 하는 것까지는 좋지만, 벼 이외의 것이 없었다고 하는 증명은 아닙니다. 벼도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사람은 그곳에서 물을 펐을지도 모르고, 수생 동식물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것을 저는 역시 상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네요.


사사키; 잎의 세포화석이란 건 벼과의 주로 잎 안에 있는 규산체이지요.


사토; 잠깐 사진을 보시지요(제2장 그림 2-2). 이것이 벼잎 안의 기동세포라는 세포에 모인 실리카와 유리질 덩어리입니다(그걸 규산체라고 합니다). 그것이 잎이 말라 버린 뒤에도 흙속에 남아 있다.


사사키; 잎의 세포화석은 벼의 종류마다 다양한 형태로 정해져 있어, 유리질이면서 썩지 않아 잘 남아 있다. 따라서 벼과의 어떤 식물이 있었는지를 고고학으로 실증하는 데에 매우 유용하다.


사토; 그렇지요. 그래서 대나무에는 대나무 잎의 세포화석, 벼에는 벼 잎의 세포화석이 있다. 그렇기에 벼 잎의 세포화석이 나오면 곧 논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벼가 있었다는 증명이기는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다른 것이 없었다는 걸 유감스럽게도 증명할 수 없다. 그 주변이 어렵지요.


사사키; 이 유적의 상황은 매우 원시적이며, 논이라 말하고 싶은 사람은 그래도 좋겠지만. (웃음) 이후 시대의 논두렁이라든지 수로로 정확히 구획된 정비된 논과는 다릅니다.


사토;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사키; 그러니까 잘 정리된 논, 논두렁과 수로로 구획된 생산성 높은 논이 나온 건 동아시아에서는 앞에 서술했듯이 양저문화의 시대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중에 일본 열도의 이야기도 나올 것이라 생각하지만, 조몬시대의 말기부터 야요이 문화의 시작 무렵에 큐슈 북부 지역에서 출현하는, 예를 들면 이타즈케板付 유적의 논 등은 정말로 멋지게 정비된 것입니다.


사토; 그렇지요. 일본에는 완성형 논벼농사가 생긴 겁니다.


사사키; 그렇지만 그러한 논이 전래하기 이전에도 벼농사는 영위되고 있었기에, 그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유라시아 전체를 보면 서쪽은 어느 쪽이냐 하면 밭농사로 목축과 젖 문화에 결합된 농경이 있다. 동쪽은 논을 경영하고 무리 동물이 아닌 가축의 사육과 결합된 벼농사 문화가 있다. 여기에서 이야기를 조금 까다롭게 했습니다만, 문제는 인도 아대륙입니다.


사토; 인도와 인도의 북쪽이지요.

사사키; 네. 인도의 문제는 매우 어렵지만, 인도 아대륙의 농업 지대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북서부의 펀자브부터 갠지스 상류에 걸친 맥류농사 지대, 중앙부의 데칸 고원을 중심으로 하는 잡곡(조) 지대, 수수와 향모 및 잡곡류가 재배되고 있습니다. 더욱이 인도 아대륙의 아삼과 갠지스강 중하류에 펼쳐지고, 인도 반도의 동서해안에도 분포하고 있는 것이 벼농사 지대입니다.

이처럼 아라칸 산맥에서 서쪽의 벼농사 지대는 매우 큰 논벼농사 지대입니다만 재배하는 벼는 자포니카가 아닌 인디카가 많고, 게다가 잡곡과 맥류농사가 중첩되어 있는 곳이 적지 않습니다. 사실 인도의 벼농사는 파종과 탈곡의 방법, 젖 문화와의 관계와 가공 쌀 만드는 법 등에서 맥류농사 농경과 잡곡 농경 등의 영향이 강하게 보이며, 아라칸 산맥에서 동쪽의 벼농사와는 꽤나 다르지요. 


사토; 아라칸에서 서쪽 지역의 벼농사는 동쪽의 벼농사와 완전히 이질적이라 생각하네요. 나카오 사스케中尾佐助 씨가 말했는데, '"인도에는 벼농사 문화라고 하는 것이 없다"라는 건 역시 확실하네요. 동아시아의 벼농사 문화, 인도의 벼농사 문화라는 건 언뜻 비슷하나 다른 것으로, 둘에게 공통으로 존재하는 벼농사 문화라는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유라시아 농경의 북쪽과 남쪽의 퍼짐새


사사키; 에전에 유라시아의 농경을 생각할 때 미처 주목하지 못했던 것이 유라시아 북부를 동서로 잇는 농경지대의 존재입니다.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북극해로 들어가는 큰강으로 오비강, 에니세이강이 있습니다. 이 두 강의 가장 상류는 알타이산까지 이르고, 그 가운데 오비강의 가장 상류 지역에는 기원전 3-5세기 무렵의 유명한 동결 고분군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파지리크 고분은 고분의 도굴 구덩이 등에서 물이 들어와 그 물이 얼었던 겁니다.


사토; 동결된 맘모스 같은 것이죠.


사사키; 그렇습니다. 큰 목재를 쓴 대형 목곽 무덤에 동결되었기 때문에 안에 있는 유물이 깨끗하게 남았던 겁니다. 그곳에서 페르시아산 커다란 양탄자를 시작으로 마구류와 장식품, 기타 나릇이 달린 마차 등도 출토되고, 말도 몇 십 마리가 묻혀 있었습니다.


사토; 말도 함께 남아 있었던 겁니까?


사사키; 일부는 미이라가 되어 있었습니다. 북방 유라시아 학회를 중심으로 1991년에 러시아와 공동으로 알타이의 우코크 고분을 조사하여, 저도 다른 고고학자와 함께 견학하러 갔습니다(그림4-6). 발굴된 고분은 완전히 동결되지 않아서 잘 되지 않았지만, (웃음) 여하튼 이 부근 알타이산의 북사면부터 산기슭 일대는 쭉 완전한 초원지대입니다.

기원전 3000년대 말 무렵부터 2000년대에 걸쳐서 아파나시에보 문화가 영위되었습니다. 특히 안드로노보 문화는 흑해와 카스피해의 북쪽부터 알타이산에 걸쳐 초원지대에 전개된 스키타이계의 청동기 문화로 가축으로 말을 소유하고, 쿠르간(옛 몽고 무덤)을 만들며, 소규모 농경도 경영하는 목축민의 문화입니다. 그 뒤 이 지역의 문화는 목축의 요소를 차츰 강화하는데, 그래도 관개 조직을 수반한 기장과 조 등의 재배 전통은 기원후 상당히 이후의 시대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림4-6 알타이산의 초원과 유목민 천막. 알타이산과 그 북쪽 기슭에는 광대한 초원이 펼쳐진다. (사진: 사사키타카아키)



사토; 보리는 어떻습니까?


사사키; 물론 보리도 있었습니다. 기장과 조 등도 재배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말을 부장한 동결 고분은 목축귀족의 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만, 그들도 농경민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는,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초원지대에 농경이 서쪽부터 동쪽으로 쭉 이어져 있었던 겁니다.


사토; 확실히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선생은 북쪽의 농목문화의 회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만, 사막 한가운데에서도 농목문화의 길이 있었습니다. 언제부터 사막이었는지는 잘 조사해 보지 않아서 알지 못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사키; 지금 어느 사막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잖습니까?  S. A. 헤딘(1865-1952)이 탐험한 20세기 초 무렵에는 현재는 말라 붙어 있는 로프노르 호수는 가득한 물로 칭송되었기 때문에……


사토; 네, 오래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금 조사하고 있는 건 타림 분지의 동쪽 끝입니다. 여기는 실크로드의 길가이고, 예전에는 꽤 인구밀도가 높았다고 생각합니다.


사사키; 아까 알타이 산맥의 남쪽에 동서로 지나는 천산산맥이 있고, 그것과 티벳 고원의 북쪽을 경계짓는 곤륜산맥 사이에 있는 타밀 분지는 지금은 아주 건조한 지대이지만, 2000년 정도 전에는 분지의 동쪽 끝에 누란왕국이란 오아시스 국가가 번영했던……


사토; 그렇습니다. 게다가 누란의 아직 전의 시대에, 역시 맥류 농경이 있었지요. '소하묘'라는 유적인데(그림4-7), 새삼스럽게 강좌에 몇 번이나 등장하는데 여기에서 밀의 종자와 기장의 종자와 함께 소의 모피와 머리뼈, 양과 염소의 뼈가 다량으로 출토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사막이라 부르는 저 풍토에도 역시 역사성이 있어서 누란 시기는 이미 건조함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전에는 꽤 많은 사람이 농경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목축도 하고 있었겠네요.



그림4-7 소하묘 유적(2008년 9월 촬영)




사사키; 그래서 조금 뒤의 당나라 때에 인도로 향하던 현장삼장도 지금 같은 상태의 사막을 지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사토; 그렇게 생각하네요. 그가 고창국高昌國을 지났던 때 마중을 많은 사람이 왔지요. 환영 인파에는 여성이 수십 명이나 왔고, 스님도 수천 명이나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만약 그 이야기가 어느 정도 과정을 포함하고 있다고 해도, 한 나라를 뒷받침하는 농목업이 있었다는 건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사키; 타림 분지를 지나 '인도로 가는 길'도 천산산맥의 남과 북쪽 기슭을 지나는 '비단의 길'도 예전에는 풍요로운 오아시스와 초원을 동반하는 것으로, 그곳에서는 맥류와 함께 기장과 조 등의 잡곡류가 재배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유럽도 북쪽은 지금은 밀 지대이지만, 원래는 호밀과 귀리를 농사짓고, 오트밀 같은 거친 죽, 거기에 조와 기장 등이 들어간 걸 먹었다고 생각합니다. 북방 유라시아의 동서는 이처럼 맥류와 잡곡의 거친 죽이란 식문화를 가진 농경지대와 결합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겠죠.


사토; 그렇지요. 그 위에 사막이란 건조의 풍토가 올라타서 목축업 같은 것이 들어왔다. 


사사키; 북쪽에 관하여 말하면, 에니세이강 상류의 타가르 문화기(기원전 10-8세기)에 말이 나오게 되지요. 그 무렵에는 재갈(말의 입에 물려 고삐를 붙이는 도구)이 출현하고, 승마 기술이 발달하며, 그것과 단궁을 쓰는 '기사'의 전술이 한묶음이 되어 전투적인 기마유목민족 문화가 형성된다. 그 뒤 몇몇 민족의 흥망을 거쳐 기원전후에는 어느 종의 목축민에 의한 권력구조가 생겨납니다. 그와 함께 그 권력구조를 뒷받침하는 맥류와 잡곡의 농경이 북방의 초원지대에 존재하고, 그 농경이 동북아시아까지 도달한다는 데 주목하고 싶네요.

여기에서 북쪽에서 남쪽으로 눈을 돌리면, 앞에 기술했듯이 동남아시아의 도서부는 원래 뿌리작물 농경의 지역입니다. 저는 그 일부, 동인도네시아의 핼마헤라섬이란 곳에서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은 적도에 가까운 섬으로, 바나나와 덩이뿌리 종류를 주작물로 하는 전형적인 뿌리작물형 화전 농업을 영위하고 있었습니다. 그 현장에서 보면, 카사바를 재배하는 밭에 할머니가 수확하러 와서 수확한 카사바의 일부를 그곳에 곧바로 심는 겁니다(그림4-8). 고온다습한 열대 산림 지역이면서 1년 내내 언제나 심기와 수확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수확과 심기가 연속하는 농법이 가능합니다. 기본적으로는 바나나 등도 그러한 재배법에 가깝죠. 바나나에는 고정된 수확기란 것이 없습니다. 언제나 얻을 수 있고, 언제나 포기 나눔을 할 수 있습니다. 즉, 뿌리작물 농경이란 것에는 기본적으로 명료한 수확기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장도 없다.

그런데 종자 작물의 지대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종자 작물에는 반드시 정해진 파종기와 수확기가 있어서, 그 수확기를 중심으로 해서 수확 축제가 있고, 수확의 풍성함을 기원하는 의례가 영위되며, 그것을 주관하는 사제가 생긴다. 그래서 그 사제와 왕이 한묶음이 된 사제왕 같은 것이 출현해 왕권이 형성된다.



그림4-8 화전에서 카사바의 수확과 심기(인도네시아 핼마헤라섬 1976년, 사진: 사사키 다카아키) 카사바의 덩이뿌리를 수확한 뒤 이어서 그 일부를 잘라서 심는다. 수확과 심기 작업이 여기에서는 일련의 작업으로 행해진다.



사토; 그렇죠. 또, 종자번식 식물의 경우에는 종자를 저장할 수 있다. 이것이 중요하지요. 


사사키; 네 네, 그 저장을 대량으로 껴안은 인물이 권력을 장악하지요. 그런데 수확기가 확실하지 않고, 저장도 안 하는 뿌리작물 농경의 세계에서는 권력이 발생하는 계기가 부족하다. 따라서 왕권이 발생하고, 왕국이 나타나는 일이 거의 없다. 본래 뿌리작물 농경 지대에는 그러한 권력구조가 나오지 않는 것이 특징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토; 뿌리작물 식물은 진화가 매우 느리네요. 식물학적으로 말하더라도 그렇고, 영양번식을 되풀이하는 한 예외는 없겠지만 대부분 진화하지 않지요. 즉, 포기 나눔을 하면 몇 번을 반복해도 가지고 있는 유전자의 조합은 쭉 마찬가지이지요. 그러하면 유전적인 개량, 즉 품종개량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한 것도 역시 효과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종자번식 식물에서는 인간이 품종개량을 하겠다는 의지가 작용하면 그에 응하여 유전자의 조합이 얼마든지 변화하여, 그것으로 생산성을 유전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 왕권의 기초가 되는 수확물의 저장이라든지 증식이 인간의 의지에 대하여 잘 반응하는 거지요.


사사키; 그러니까 그러한 점에서는 유라시아 전체를 보아, 농경이 크게는 동과 서, 서의 맥류, 동의 벼라는 모습으로 대비할 수 있겠는데, 벼라는 건 어딘가에 영양번식적인 성격을 끌어당기고 있는 바가 있다. 그것에 대해 남쪽은 완전한 뿌리작물 농경 지대, 북쪽은 목축에 상당히 의존한 농경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문제는 잡곡입니다.


사토; 잡곡에서 일본인에게 가장 친숙한 것이 피와 조이죠. 피에 대해서는 이전 교토대학에 계신 사카모토 사다오阪本寧男 씨가 일본 원산설을 발표했는데, 조도 동북아시아 기원이란 설이 한때 강했지만 저는 저것은 의심스럽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건, 요즘 미국에서 인도를 연구하고 있는 동료의 연구실에 갔더니 "나는 25년 전 태국에서 조사했을 때의 조 종자를 가지고 있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 수확물을 보았는데 확실히 조 같습디다. 그것에 사사키 선생도 여러 번 언급했지만, 조는 동남아시아부터 남아시아에 걸친 지역에서도 매우 흔하게 재배하고 있습니다.


사사키; 조는 조금 전 사진에서도 있었네요. 


사토; 네, 그림4-1의 오른쪽에서 두번째입니다. 분명히 조는 한편으로는 어쩐지 북방 문화의 정취가 있지요. 그런데 아까 태국에서 행한 연구에서는 열대에도 조가 있다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간단히 북방기원설이 좋을지.


사사키; 조의 분포는 열대 아시아 전역에 걸쳐 있다고 이전부터 잘 알려져 있어서, 제가 조사한 핼마헤라섬에도 재래종 조가 있습니다. 아무튼 조라는 것은 고고학적으로도 여러 곳에서 나오고 있어요.


사토; 그런 것 같네요. 그리고 기장도 그렇지요. 도대체 잡곡의 계통은 어떻게 생각하면 좋습니까?


사사키; 간단히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만, 좀 더 정리하자면 피는 분명히 아주 오래된 것은 아시아 대륙에서 출토되지 않는다. 홋카이도 대학에 계신 요시자키 쇼吉崎昌一(1931-2007) 씨는 부유선별법이란 방법으로 발굴된토양을 물로 씻어서 그것을 0.45mm라는 매우 가느다란 망으로 선별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여러 가지 종자의 파편 등이 나와서, 그것을 현미경으로 보고 동정하는 일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 요시자키 씨에 의하면, 홋카이도에서 도호쿠 지방의 북부에 걸쳐서 조몬시대의 전기 무렵부터 피가 출토되기 시작한다. 그 출토 종자는 시대가 지나면서 점점 커져, 조몬 중기부터 후기가 되면 재배 피라고 생각되는 것이 출토된다. 그것을 '조몬 피'라고 그는 부르고 있습니다. 피는 꽤 일찍부터 일본 열도에서 재배화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사토; 그렇게 생각합니다. 연해주까지 넣어도 상관없을지 모른다.


사사키; 조에 대해서는 사카모토 씨는 광범위한 현장조사와 재배실험을 행하여, 아프가니스탄부터 인도 북부에 걸친 지역이 지원지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화북의 황토 대지의 페이리강裴李崗과 츠산磁山 등 약 7000년전이라 하는 옛 유적에서도 조 또는 피라고 추정되는 잡곡이 돼지의 유골과 함께 출토되고 있습니다.


사토; 요녕성 인근에서도 매우 오래된 조가 출토되고 있지요.


사사키; 유라시아의 여기저기에서 조는 오래전 시대의 것들이 출토되고 있다. 이것은 다시 한번 DNA라든지 무언가로 정확히 그 품종과 계통을 재조사하면 좋겠다.


사토; 조금 엉뚱한 이야기이지만, 최종 빙하기 이전의 작물일 가능성은 없을까요?


사사키; 그건 있다고도 없다고도, 잘 말하겠지만서도. (웃음) 아무튼 조라는 작물이 꽤 오래된 것이고, 유라시아 농경사에서도 중요한 작물이란 점은 틀림없다. 그러나 현재 재배되고 있는 옛 품종이 없어졌기 때문이죠. 일찍 조사하지 않았고……. 어쨌든 유라시아 대륙의 조는 북쪽으로 분포가 확산된 조와 남쪽으로 확산된 조라는, 최소한 두 계통이 있었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어요.


사토; 그건 사카모토 씨도 이야기하셨죠. 그리고 피도 그렇나요?


사사키; 사카모토 씨는 아이누에서 재배되는 옛 피를 보면, 그것은 아프가니스탄 인근에서 재배되는 피와 매우 비슷하다고 합니다. 즉, 북회노선의 조, 피와 남회노선의 그것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꼭 조사해 주세요.


사토; 그것은 많이 있지 않습니까? 밀도 아무리 보아도 북회노선, 즉 지금의 실크로드보다 더 북쪽의 경로로 전파되었다고 생각되는 계통의 것과 남쪽에서 왔다고 설명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있습니다.


사사키; 예를 들어서, 최초로 이야기를 꺼냈던 타카하시 류헤이 씨가 연구한 보리의 E형과 W형이 있는데, W형의 보리는 유라시아의 북쪽 회랑을 지나서 동쪽, 즉 동북 일본에까지 왔지요. 한편 남회노선의 E형이란 건 중국 대륙에서 서일본으로 건너왔을 가능성이 높다.



남북으로 나눌 수 있는 일본의 농경


사사키; 그러한 점을 생각하면 일본이란 곳은 유라시아의 동쪽 끝에 있는데도, 그 까닭에 유라시아의 농경사를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네요. 그림4-9는 동아시아의 식생을 주로 <중국식피中國植被>(1980년)을 참고하여 그렸는데, 중국 대륙에서는 장강 유역을 경계로 그 북쪽이 낙엽광엽수림대(졸참나무숲지대. 전형적인 건 신갈나무≒물참나무를 중심으로 하는 온대낙엽광엽수림대), 그 남쪽은 상록광엽수림대(조엽수림대)를 이루고, 그 졸참나무숲지대와 조엽수림대는 일본 열도의 동북부와 서남부에도 이르며, 이 열도의 문화와 농경의 지역차를 만들어내는 기초적인 조건을 이루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조몬시대의 인구 분포를 보아도 그 인구의 대부분이 동북일본의 졸참나무숲지대에 집중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확실히 정주를 하고 식량 비축이 풍부한 그 문화의 특색은 동북아시아의 졸참나무숲지대의 풍요로운 수렵채집민 문화의 그것과 공통되는 점이 많고, 동북아시아와 깊은 관련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림4-9 동아시아의 식생과 조엽수림 문화와 졸참나무숲 문화의 분포. 식생의 분포는 주로 <중국식피>에 따른다. 옛 만주를 중심으로 한 낙엽광엽수림대는 물참나무와 비슷한 신갈나무를 중심으로 한 산림대이고, 아무르강 유역과 연해주와 사할린의 아한대침엽수림도 실제로는 침광금강수림의 모양을 취하는 곳이 많고, 일부는 신갈나무를 중심으로 한 졸참나무숲지대와 비슷한 경관을 나타내는 곳이 적지 않다.




사토; 서장의 그림-2는 일본 열도에서 전개된 전통적인 농경의 지역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곳에 실선③이란 선이 있지요. 이것이 위의 지도에서 보시듯 보리의 W형과 E형의 경계선이고, 선의 동북쪽이 W형, 서남쪽이 E형인 보리의 분포 구역입니다.


사사키; 그밖에도 선과 표시가 적혀 있지요?


사토; 네, 무엇을 가리키는지, 어느 시기인지에 따라서 이세만과 와카사만을 연결한 선으로 경계를 이루고, 태평양 쪽과 일본해 쪽을 나누는 선으로 구분된다고 생각되는 것도 있습니다. 그것들을 구별하여 정리한 겁니다.

그런데 우선 명확한 건 벼이지요. 조몬 벼농사의 존재가 증명된 유적은 '이세만-와카사만' 선(실선②)의 서쪽이네요. 동쪽에 요시자키 씨가 찾아낸 조몬의 쌀이 하나 있지만, 전체의 경향으로 말하자면 조몬의 벼농사는 이 선의 서쪽에서 전개되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사키; 요시자키 씨가 발견한 건 실선②의 동쪽 가운데 가장 북쪽, 하치노헤시 카자하리風張 유적의 조몬 후기 주거터에서 나온 쌀인데, 벼가 출토된 건 없어요. 아마 그 쌀은 서일본에서 가지고 있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조몬의 벼농사는 동북일본에는 없었다고 생각해도 좋은 거지요.


사토; 쌀은 있어도 벼농사가 있었다고는 말하지 못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몬시대에 벼가 재배되었단 건 이 서쪽, 즉 서일본에서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사사키; 그러니까, 조몬시대의 곡물에 대하여 말하면 일본 열도의 동북쪽은 피였을지도 모른다.


사토; 피였다고 생각합니다. 이 피에도 두 가지가 있어서, 동(북)의 피는 돌피(Echinochloa crus-galli)라는 재배형 피입니다. 유전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4배체입니다. 한편, 서쪽의 피는 물피(Echinochloa oryzicola)라는 논의 잡초, 6배체의 종이란 구별이 있습니다.


사사키; 이 동쪽의 피, 서쪽의 벼라는 것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언급한 요시자키 씨가 이미 기술해 놓았지요.


사토; 그 다음에 재래종 보리 가운데 좀 전의 E형 보리라는 것이 서남서 일본에 주로 분포하고, W형 보리가 동북 일본, 특히 홋카이도와 도호쿠 지방의 북부에 퍼져 있었어요.


사사키; 맥류만이 아니고 아시다시피 야마가타 대학 교수였던 아오바 타카시青葉高(1916-1999) 씨가 연구한 재래종 순무에 대해서도 서양종 계통의 순무와 일본종 계통의 순무라는 두 종류가 있어서(그림4-10), 서양종 계통의 순무는 보리의 W형과 마찬가지로 시베리아에 연결되고, 일본종 계통의 순무 그것은 중국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밖에도 우엉이라든지 삼, 파, 유채 종류 등은 산나이마루야마三內丸山 유적을 시작으로 몇 개의 조몬 유적에서도 출토되고 있습니다.



그림4-10 서양종과 일본종 계통의 순무 분포. 서양종 계통의 순무는 지도의 바깥, 도호쿠 지방의 일본해 연안에 많은 걸 알 수 있고, 옛날 대륙엣 직접 건너왔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한편 일본종 순무는 서일본에 퍼져 있다. 교토의 전통식 절임인 센마이즈케千枚漬는 이 일본종 순무로 만든다.



  

 그러한 것은 모두 북쪽에 계통적으로 이어지는 작물이고, 저는 이들에 북회노선의 조와 피 등을 더하여 '북방계 작물군'이란 이름을 붙였는데, 이 북방계 작물군으로 상징되는 북쪽에서의 농경이 있었지요. 그것은 일본 열도에서는 낙엽광엽수림대, 즉 졸참나무숲 지대의 동일본부터 북일본에 펼쳐지고, 벼를 중심으로 일본종 계통의 순무와 쌀보리(E형 보리) 또는 남회노선 계통의 조와 피 및 토란 등으로 상징되는 농경이 조엽수림대, 즉 서쪽부터 남쪽으로 이어졌다고 하는 것이네요. 


사토; 그리고 생쥐의 계통 안에 무스(Mus)형이라 부르는 것과 카스타네우스(castaneus)형이라 부르는 것 두 가지 유형이 있어서, 쥐의 유전학을 연구하고 있는 이화학연구소의 모리와키 카즈오森脇和郞 씨에 의하면, 도호쿠 지방을 남북으로 분단하고 있는 선의 북쪽은 카스타네우스형이고 남쪽은 무스형이라고 합니다.


사사키; 일본의 농경은 전통적인 재래 작물의 특색으로 보아 북쪽 계통과 남쪽 계통 두 가지에 의하여 이루어져 왔지요. 그런데 조몬시대의 말, 야요이 시대의 시작 무렵에 아까도 서술했던 논벼농사를 수반한 벼농사 문화가 건너와서 일본 열도의 서쪽부터 퍼졌기 때문에, 재래 작물의 동서차, 남북차가 매우 희박해져 버렸던 겁니다. 어느 쪽이든 일본 열도 농경문화의 기층에는 유라시아의 북과 남으로 연결되는 계통의 서로 다른 두 가지 농경의 전통이 있다고 분명히 지적해야 한다고 생각하네요.


사토; 그렇지요. 그 차이는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이상으로 크다고 생각하네요. 그래서 도호쿠예술공과대학의 아카사카 노리오赤坂憲雄 씨가 "여러 가지 일본"이라 말하듯이 똑같은 일이 재배식물과 식문화, 농경문화 같은 측면에서 보아도 역시 동북 일본의 문화와 남서 일본의 문화라는 명확히 이질적인 것이 공존하고 있어요.  


사사키; 동일본과 서일본에서 언어와 습속, 사회 및 그외의 여러 가지 점에서 지역차가 있는 건 모두 많은 사람에의하여 지적되지만, 그 배후에는 유라시아 농경문화의 계통 차이가 반영되어 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토; 그렇지요, 반영되어 있습니다. 일본 열도에서는 말에도, 문화에도, 인간에도 지역차가 있었을 텐데, 대립 등이란 것을 말하지만 지금은 그러한 구별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 일종의 세계화에 의하여 뒤섞여 버렸겠죠. 


사사키; 서일본의 농경문화라고 하면, 일본 열도에서 뿌리작물 농경에 미친 직접적인 영향에 대해서도 주목하게 됩니다. 

뿌리작물 농경에 상세한 서남일본식물정보연구소의 소장 홋타 미츠루堀田滿 씨에 의하면, 열대 계통의 2배체 미가시키ミガシキ군의 토란과 열대 계통 참마 다이죠ダイジョ의 분포가 중국 남부지방과 필리핀부터 류큐 열도를 따라서 북쪽으로 뻗어서 큐슈와 시코쿠 남부에 이른다고 합니다. 사실 고치현 해안부를 중심으로 열대 계통의 참마 야생종의 하나인 니가카시우이모ニガカシウイモ가 식물로 분포하고, 예전에는 물에 담가서 식용으로 이용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 열대 계통의 덩이류는 아마 쿠로시오 해류를 따라 대만과 류쿠에서 전파되어 온 것으로, 열대에서기원하는 뿌리작물 농경문화의 일부가 직접적으로 남방에서 전래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정말로 일본이란 곳은 아시아 안에서 경계인 곳이지요.


사토; 그렇네요. 경계인데, 경계이기 때문에 농경문화 그것이 매우 풍부하다고 생각되네요.



'풍부한 농경'이란?


사사키; 지금 농경이 '풍부하다'는 것을 말씀하셨는데, 어떠한 농경이 '풍부한' 것입니까? 예를 들면, 미국의 면화 지대, 옥수수 지대에서는 옥수수와 면화를 집중적이고 대량으로 농사짓고 있습니다. 생산량은 세계에서 가장 풍부합니다. 그것은 농경으로서 '풍부하다'고 할 수 있는 겁니까?


사토; 이 프로젝트를 종합지구환경학연구소에서 시작한 의향은 지금의 농업은 단기적(몇 십 년)으로는 풍부할지 모르지만, 백 년, 몇 백 년이란 단위에서 보면 도저히 견디지 못한다는 측면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냉해가 있어 돌연 병과 해충에 의한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괴멸적인 일이 일어날 수도 있죠.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면, 즉 백 년, 이백 년, 삼백 년 같은 기간으로 생각해 보면, 이러한 대규모 단작(모노컬쳐)은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하네요. 이것은 현대의 일본 논을 고려해도 그렇습니다. 논벼농사는 매우 지속적이라고 모두 말씀하십니다. 그럼 지금의 논을 보고 지속적이냐고 말할 수 있는가 하면, 저는 반드시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사키; 그래서 다시 한번 묻고 싶은데, 지금 우리는 옛날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어느 쪽이냐 하면 역사적으로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역사적인 시야에서 본 농경이란 것을 생각하면, 농경이란 것은 순환형이고 안정되어 있는 것을 본래 농경의 모습이라 생각해요. 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입니다. 밭농사의 경우에는 앞에도 기술했듯이 유럽 중세의 삼포농법에서는 돌려짓기를 행해 농지를 묵혀 가축을 방목하여 농지의 비옥도를 유지했다. 삼포농법은 유럽만이 아니라 네팔에서도 논과 밭의 그루터기에 방목을 행하여 일종의 삼포농법을 하고 있습니다(그림4-11). 휴한지 방목을 하는 겁니다. 



그림 4-11 네팔의 농목 경관(사진: 사사키 다카아키)

(위) 밭의 구역을 나누는 가축담. 중부 네팔 시카 마을의 가축담과 경지(1963년 9월). 마을 아래에 가로로 길게 이어지는 곳이 농지 구역을 나누는 나무 울타리에 해당하는 돌담. 돌담 아랫부분의 농지 구역에서는 옥수수의 수확이 끝나고, 그루터기에 가축 무리를 넣는다. 돌담보다 위는 향모의 경지로 아직 수확이 끝나지 않았다.

(아래) 논 그루터기의 방목. 가라 마을의 논 그루터기 방목(1963년 10월). 논의 그루터기에 일제히 방목하는 소의 무리. 가설된 가축의 우리가 두 개 보인다. 방목은 밀의 파종기까지 이어진다.




사사키; 소와 물소를 베어낸 그루터기에 넣는 겁니다. 마을 안에서 가축담으로 에워싼 농지 구역이란 곳이 몇 군데 있고 그 농지 구역마다 작물의 재배와 휴한 방목에 대한 규칙이 있어 휴한기에는 가설한 가축의 우리를 설치해 방목하는 일종의 삼포농법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밭농사라는 건 어떠한 형태로 목축과 연결되어서 경작과 휴한 체계가 있고, 그것이 정확히 기능하는 한 농경은 안정적으로 영위될 수 있는 것이지요.

화전 등에서도 그렇습니다. 화전은 최근에는 환경파괴의 원흉 등이라 이야기되고 있지만……


사토; 그건 터무니 없이 잘못된 의론이네요.


사사키; 전통적인 화전을 보면 숲을 벌채하고 불을 놓아서 화전 경지를 만드는데, 전통적인 화전민들은 벌채하기 전에 의례를 하는 게 보통입니다. 예를 들어 고치현의 이케가와 마을(池川町) 등에서 조사한 바로는 불을 놓기 전에 '오타노미おたのみ'라고 부르는 산신에게 기도합니다.

"기어서 도망가는 건 기어서 도망가 주시고, 날아서 도망가는 건 날아서 도망가 주세요. 산신 님, 땅신 님, 부디 지켜 주세요."라고(그림4-12).

화전민들은 화전을 하는 동안만 산신에게 토지를 빌린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땅 동냥'이라 말하기도 하는데, 그동안 예를 들어 큐슈의 화전민은 산신을 '세비せび의 가지에 모신다. 그 세비의 가지라는 건 화전 경지의 가장 큰 나무의 꼭대기입니다. 그곳에서 산신이 잠깐 쉰다. 화전의 경작을 마치면 산신에게 다시 한번 원래의 산과 숲으로 돌려준다고 화전민들은 생각합니다. 결코 산과 숲의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를 잠시만 신에게서 빌려 화전을 경영한다는 사상입니다.  


그림4-12 화전의 불을 놓기 전 산신에게 간절히 기도(고치현 이케가와 마을 츠바야마椿山 1970년 4월, 사진: 사사키 다카아키) 전통적인 화전민들은 화전을 만들기 전에 산신에게 잠시 물러나 주기를 기원하고, 작업의 안전을 기원한다.




사토; 그림4-13은 라오스의 사진인데, 저도 역시 보러 갔지만 숲을 벌채하기 전과 씨앗을 뿌리기 전에 반드시 의례를 하고 있지요. 라오스의 사람들은 '피'라는 정령을 믿어서, 화전 전에는 꼭 피에게 기도를 드린다. 기도를 드려 피에게 힘을 빌린다는 허락을 얻는 겁니다.



그림4-13 하늘에서 본 화전 경지. 라오스 루앙프라방 부근에서




사사키; 그것은 제가 조사한 핼마헤라섬의 화전민들 역시 똑같았죠. 그곳에서는 숲에 모로라든지 멧키라는 숲의 정령이 있어서 이 숲의 정령에게 "화전을 하는 동안만 토지를 빌려 주세요. 화전이 끝나면 돌려주겠습니다."라고 기도하고, 화전 경지 안에서 가장 키가 큰 나무를 '왕의 나무'라 부르며 벌채하지 않고 남겨 놓는다. 화전을 경영하는 동안 그곳에서 정령들이 잠을 잔다는 관행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제사를 잘 남기고 있는 화전민의 바탕에는 반드시 휴한기간을 충분히 두어서 화전이 버려진 뒤에 숲의 식생이 잘 회복되어 다시 숲으로 돌아가서 화전을 또 할 수 있게 됩니다.


사토; 즉, 가축의 대신에 식물이 윤회하는 거지요.


사사키; 그런데 인도네시아 등에서는 자바섬의 인구가 매우 과잉이 되어 그곳에서 농업 이민이 칼리만탄 등으로 송출되네요. 그런데, 농업 이민은 신을 모두 고향에 놔둔다. 그래서 신이나 정령과 관계없이 숲을 벌채하고 불을 붙여 태우고, 그곳에서 농지를 만들어 농경을 합니다. 그들은 개척민이기에 숲을 신과 정령에게서 빌려서 이용이 끝나면 또 돌려준다는 정신이 없는 겁니다. 그러한 방식으로 개간을 하기 때문에 순환적인 농법이 아니게 되고, 그 결과 숲이 사라져 못쓰게 된다. 이런 종류의 영구적인 경지를 만드는 농업 개간(개척)에 따르는 불 놓기와 본래의 화전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화전 농경이란 건 본래는 순환형으로 자연을 파괴하지 않는 농법입니다.


사토; 그렇습니다. 그림4-13은 라오스의 루앙프라방 근처를 지나며 비행기에서 찍은 것인데, 허옇게 보이는 곳이 올해 벼를 심은 곳이지요. 조금 색이 옅은 곳이 지난해 그 전에 벼를 재배하고 올해는 휴한을 하는 곳이고, 좀 더 색이 짙은 곳이 몇 년 전에 화전이었던 곳입니다.


사사키; 더 짙은 곳은 식생이 완전히 회복되어 숲이 되었다.


사토; 그렇지요. 휴한하고 십 년, 십오 년이 되었다. 


사사키; 그러나 이 풍경은 화전으로 이용하는 장소가 양으로는 좀 너무 많네요.


사토; 좀 너무 지나칩니다.


사사키; 좀더 숲의 식생이 풍부하고, 숲의 면적이 넓은 곳에서 화전을 하는 경우에는 이런 식으로 화전의 비율이 과밀하지는……


사토; 않지요.


사사키; 이곳은 좀 토지이용이 과잉이고, 지나친 경작으로 좋은 숲이 점점 사라진다.


사토; 그렇지요.


사사키; 사실은 양호한 숲의 비율이 더 많으면 더욱 풍부한 화전을 경영한다. 본래 화전은 앞에서 설명했듯이, 완전한 순환형 농경일 텐데.


사토; 완전히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삼포식 농업의 경우에는 가축의 배설물을 썼다. 동남아시아(계절풍 아시아)의 경우에는 무리 가축의 사육이 적기에 배설물도 적을 테지요. 그것을 대신하려고 식물성 소재를 쓰는 농경 체계를 탄생시킨다. 


사사키; 네 네, 식물의 힘으로 토지의 비옥도를 원래로 되돌린다. 그를 위해서는 휴한기간이란 것이 의외로 의미가 있지요. 휴한지에는 여러 가지가 생겨 납니다. 


사토; 약을 얻는다든지, 지붕의 재료를 얻는다든지, 새끼줄과 고삐가 되는 식물 섬유를 모은다든지 하지요. 그러니까 그 지역 사람들은 휴경지가 생산성이 없는 토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사키; 차가 자란다든지, 고사리와 칡이 자란다든지, 그것을 먹을거리로도 삼지만 두드려서 의복의 재료로도 쓰는 쐐기풀 따위가 자라기도 하지요. 휴한기간이란 건 숲 그곳이 회복함과 함께 그동안에 생활필수품을 많이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화전이란 곳은 일반적으로 작물을 한 종류만 키우지 않고 주작물 외에 다양한 작물을 뿌리거나 심거나 합니다.


사토; 그림4-14 같은 상태이지요.



그림4-14 화전 작물의 다양성. 라오스 루앙프라방 근처에서.




사사키; 여러 가지 있지요.


사토; 조금 조사해 보았습니다. 타로 토란이 있고, 카사바, 오이, 참깨, 레몬그라스, 10가지 종류 정도의 작물은 간단히 꼽을 수 있지요.


사사키; 화전에서 재배할 수 있는 작물은 매우 다양하고, 전체가 균형을 잘 이룬다.


사토; 그렇습니다. 게다가 콩류와 곡물을 함께 재배하면 콩이 공기의 질소를 고정시켜 좋은 거름으로 바꾸어주기에 그러한 힘도 빌리면서 현명하게 농업을 하게 되지요.


사사키; 화전만이 아니라 본래의 농업이란 것은 매우 다양성을 가지고 순환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논 이야기로 돌아가서, 논도 지금은 벼만 농사지어 벼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사토; 옛날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요. 가장 큰 건 수생 동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그림4-15의 사진을 보아 주세요. 이것은 아십니까? 인도네시아의 셀레베스섬에서 찍은 건데, 논 한가운데에 둥근 구멍이 있고 그곳만 깊습니다. 그 지역 사람들은 모내기할 때 물고기도 함께 놓아주고, 물고기에게 잡초를 먹게 합니다. 물고기가 똥을 싸기에 벼에도 좋다. 가을이 되어 수확철이 되어 벼를 수확하고 물을 빼면 물고기는 깊은 구멍의 양어지인 곳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림4-15 셀레베스섬의 벼논양어




사사키; 그리고 꼼짝않고 월동한다. 구멍 속에서 이듬해의 모내기까지 기다리지요.


사토; 그렇습니다. 때로는 이 작은 못에 물고기를 잡으러 간다. 새가 오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 안에 마른 대나무 가지를 놔두지요. 대나무의 마른 가지를 두어, 이것이 아프기에 새가 오지 않는다. 잘 되고 있어요.


사사키; 아무튼 벼논양어라는 건 계절풍 아시아의 논 지대에서는 어디에서나 하고 있다. 중국 서남부의 소수민족, 특히 구이저우의 묘족 등은 그 논에서 기른 물고기를 재료로 하여 식해를 만듭니다. 이와 같은 식해가 오늘날 초밥의 원조이지요.


사토; 논에서 전분도 얻고, 단백질도 얻는다. 이 체계가 계절풍 아시아의 농경 방식이라고 생각하네요. 저는 '쌀과 물고기의 동소성'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사사키; 그래서 순환형이 되어 균형이 잡힌다고 하지요. 그런데 농약 등을 넣으면 그 균형이 무너져 사라진다. 그러니까 그러한 균형 잡힌 순형형이고 다양성을 잘 보전하는 것이 농경의 본래 모습이라고 생각하네요.



농업의 다양성


사토; 그렇게 생각해요. 그것을 말하면 생산성이 어떻다든지, 일본의 총인구를 먹여살리는 방책이 아니라든지, 곧바로 불만스런 이야기를 듣겠지만, 생각해 보면 농약을 치는 돈도 들지 않고, 농약이 소비하는 이산화탄소도 배출하지 않기 때문에 지구환경을 위해서는 결코 나쁘지 않을 거예요. 잘 생각할 수 있다.


사사키; 그러한 본래의 순환형 농경의 상태는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상에 입각하면 부정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럼 대규모 단작으로 앞에 서술한 미국의 옥수수 지대와 면화 지대 같이 되어 버리면 이번은 인공 비료를 연속적으로 계속 투입하게 되는데, 그래서 결국 토지가 피폐해져 생산성이 견디지 못하게 되어 버리죠.


사토; 그렇습니다. 견디지 못하게 되고, 생산량은 오르지만 투입량도 굉장하지요. 그래서 머지않아 파탄날 때가 옵니다. 그 다음에 또 하나는 대규모 단작으로 놔두면 무엇인가 있었을 때에……


사사키; 한번 병이 발생하면 모두 쓸모없게 됩니다.


사토; 그것을 인류는 언제나 경험해 왔지요.


사사키; 당신의 연구 프로젝트 제목은 '농업이 환경을 파괴할 때'라는 것이었지요.


사토; 네. 우리들의 프로젝트는 환경의 역사를 차근차근 밝혀서 인류의 미래 가능성을 생각한다는 지구연의 '문명·환경사'라는 프로그램(연구영역)에 속하고, 특히 여기 1만 년의 농업과 환경의 관계를 밝히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연구반을 가동하기 전부터 알려져 있었던 것인데, 인류사 가운데 농업생산은 언제나 급격한 하락을 경험하고, 때로는 대기근과 그에 수반한 인구의 격감, 유출 같은 이른바 '붕괴' 사례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들 '붕괴' 사례를 상세히 조사하면 농업이 무언가 나쁜 일을 하여 그를 빌미로 그렇게 된 사례가 많습니다. 연구반으로서는 여러 가지 풍토를 기반으로 그러한 붕괴가 왜 생겼는지 그 과정을 해명하는 속에서 복잡하게 얽힌 요인 하나하나의 인과관계를 시계열로 정리해 간다. 그러한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농업이 나쁜 일을 한다고 생각되는 사례 가운데 큰 이유가 되는 것의 하나로 '다양성의 상실'이 있습니다. 다양성이란 생태계 안에 여러 가지 생물이 있는 상태, 또는 하나의 작물 안에도 여러 가지 품종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사라질 때 붕괴의 방아쇠가 당겨지는 것이 아닐까? 그러한 가설을 세운 겁니다. 그리고 대규모 단작은 그 하나의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가설인 표현이지만……


사사키; 그래서 농업에서 다양성이 사라지고, 순환적 안정성이 사라질 때에는 정말로 그것 자체가 환경을 파괴하게 된다.


사토; 그렇습니다.


사사키; 그러하다면 현재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웃음)


사토; 그것은 이 프로젝트가 끝나기까지 앞으로 3년이 남아서 3년 안에 생각한다는 건데, (웃음) 잘 나아가는 것이 그럼 옛날로 돌아가자는 것이냐고 비판하지만 그런 일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다만, 다양성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란 건 최근 여러 가지가 개발되었기 때문에, 그러한 기술을 사용하는 것도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벼를 예로 들면 갖가지 품종을 뒤섞어 놓는다. 이것만으로도 매우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콩과 벼를 함께 심어 놓는 새로운 방식도 있을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예전의 생활 속에 남아 있던 다양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사키; 전통적인 지혜를 어떤 방법으로 잘 현대에 살릴지 하는 것이겠네요. 적어도 부시 전 대통령처럼 "옥수수를 모두 연료로 만들어 돈을 버세요"라는 건 언어도단입니다. 세계의 식량이 충분하지 않을 때 옥수수를 연료로 쓴다고 하는 건 상식을 벗어난 발상이라 생각합니다. 저것은 옥수수의 가격이 싸기 때문에 그걸 높이려고 한 말인 듯한데, 그렇다면 말이 안 됩니다. 중요한 건 가격의 문제가 아니라 농업과 먹을거리 전체의 균형을 어떤 식으로 지속적으로 유지할 것인지가 문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토; 그렇지 않으면 지속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해요. 그림4-16을 보아 주시겠습니까? 사사키 선생도 이 그림을 기억하고 계실 거라 생각하는데, 나카니시 타츠토시中西立太 씨라는 화가에게 야요이 시대의 논벼농사 복원도를 그려 달라고 한 것이지요. 아래가 옛날판이고, 위가 최신판입니다.



그림4-16 야요이 시대의 논벼농사 상상도


사사키; 이것은 주간 아사히 백과의 <일본의 역사>에 저와 고고학자인 사하라 마코토佐原眞(1932-2002) 씨가 야요이 시대에 행해진 벼농사의 구체적 모습을 그려 달라고 한 것으로, 맨 먼저 나카니시 씨에게 그려 달라고 한 게아래 그림이고 약 20년 전의 초판(1987년)에 게재했습니다. 위의 그림은 그 뒤 사토 씨와 함께 작업한 것으로, 2003년 신정증보판에 게재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그림에는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위 그림의 오른쪽 아래와 중앙부의 윗부분에는 잡초가 가득 자라고 있습니다. 20년 전의 아래 그림에서는 휴경 논이 있다는 등은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일본의 논은 온통벼를 농사짓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꽤 휴경을 하여 그 휴경 논에는 잡초가 가득 자라고 있었단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잡초가 자란 휴경 논이 있는 모습의 그림으로 변경된 겁니다. 


사토; 예, 휴경 논의 발견이네요.


사사키; 그와 같은 점을 우리는 매우 강조한 겁니다. 기존에는, 라기보다 지금도 일본의 고고학자들은 일본의 논에서는 휴경지 등이 없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토; 저것은 어떤 것이죠. 난폭하군요.


사사키; 그건 열심히 해서 제가 발굴하고, 그곳이 휴경 논으로 벼를 재배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실망하지 않을까요?


사토; 국립역사민속박물관의 하루나리 히데지春成秀爾 씨에게 혼났습니다. (웃음) "벼를 재배하지 않는 논이 있는 등, 당신은 그런 실례되는 말을 합니까"라고 이야기를 들었네요. 뭐, 그럴지도 모릅니다. 


사사키; 그런데요, 우리도 포함해서 지금 일본의 모두는 논이라 말할 때 떠올리는 인상은 황금빛으로 익어서 눈에 들어오는 논입니다.


사토; 그렇지요. 저것은 농약과 화학비료와 트랙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즉, 지금의 농업은 완전히 석유로 만들어진다. 그 세 가지가 몰수된다면 에도시대의 농민처럼 아침부터 저녁까지 납작 엎드려 김매기를 계속 하지 않으면……


사사키; 에도시대의 논에는 말린 정어리 등의 거름을 꽤 넣고 있었지요.


사토; 물론 넣었습니다. 그래서 그야말로 환경이란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속적으로 벼농사를 계속 할 수 있을지 하는 것이지요.


사사키; 이것은 그림에는 없었던 것이지만, 당시의 벼농사라는 건 홑짓기가 아니다. 많은 종류의 벼를 하나의 논에서 재배하고 있었다. 그 많은 종류의 벼는 수확할 때 밑동을 베는 게 아니라 이삭을 베었던 것이 확실해요.


사토; 밑동을 베게 된 것은 좀더 뒤의 일이었지요. 옛 시대는 이삭 베기였죠. 


사사키; 저는 일찍이 네팔에서 향모의 이삭 베기를 조사한 적이 있었는데, 작물 각각의 익음때가 다르다. 지금처럼 품종이 통일되어 있지 않기에, 알곡이 성숙하는 시기가 제각각이지요. 이건 덜 익었으니 앞으로 일주일 뒤에 베는 등으로 이삭을 보고 베는 거지요. 그러니까 이삭 베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옛 시대의 벼도 익음때가 일치하지 않아, 이삭 베기를 했습니다. 실제로 이삭을 베는 용도의 돌칼도 많이 출토되어 있습니다. 거기까지 이 그림4-16에는 묘사할 수 없었지만, 벼의 품종은 매우 다양했을 겁니다.


사토; 그렇게 생각합니다. 라오스의 화전에서 조사한 적이 있었는데, 하나의 밭 안에 적어도 아홉 종류의 벼가 검출된 일이 있습니다. 사정은 예전의 일본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합니다.


사사키; 그리고 잡초가 가득 자란 논, 즉 휴경 논이 그 근처 안에 많이 있었던 게 실태이지요.


사토; 그렇습니다. 잡초 투성이라서 다양합니다. 그리고 해충이 오는 등으로 말하면, 그것을 일망타진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또 아마 논과 수로에서 물고기도 많이 잡혔을 테죠. 


사사키; 물고기를 잡는 건 쓰지 않았는데요. (웃음)


사토; 어떻습니까. 다음에 나카니시 씨에게 의뢰할 때에는 통발 등을 사용해 물고기를 잡는 장면을 그려 달라고 하는 것이요. (웃음)


사사키; 그렇지만, 예를 들면 모내기도 아주 제각각인 방향으로 모내기를 한다. 이것 등도 그림을 그릴 때 아무쪼록 나카니시 씨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래도 아직 논두렁이 아주 똑바르지 않습니다. 사실 논두렁은 좀더 구부러져 있어서 믿을 만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모두의 인상은 현대의 논이지요. 


사토; 저도 나카니시 씨에게 좀더 어지럽게 하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역시 화가는 그렇게 할 수 없어서. (웃음)


사사키; 저도 여러 주문을 했습니다. 큰 논두렁만이 아니라 작은 논두렁도 있다든지, 나카니시 씨는 대단히 이쪽의 주문에 응해 주셨지요.


사토; 확실히 꽤 현실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이것이 예전의 논벼농사의 구체적인 모습이어서, 이른바 생태학적으로 말하는 다양한 상황이 보존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사사키; 현재의 논벼농사는 완전한 홑짓기 형식이고 인공적인 면이 매우 높은데, 예전의 논은 그렇지 않고 그 자체 귀하가 말했듯이 생태학적으로 매우 다양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슬슬 시간이 되어가는데, 역시 농경이 다양성을 복원하고 순환적인 특성을 유지하면서 지속적으로 운영되는 것은환경문제를 생각해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때 무엇을 참고할지 이야기하자면, 우리 인류는 1만 년에 걸쳐 농경을 해 왔고, 그 안에 축적된 여러 가지 지혜가 있을 테지요. 예를 들면 돌려짓기와 휴한을 한다든지, 대규모 단작이 아니라 다양한 작물을 섞어짓기하는 등 많은 지혜가 있습니다. 그 전통적인 지혜를 얼마나 잘 사용하여 새로운 안정적인 농경을 만들어내는지가 앞으로의 큰 방향성이라고 생각해요.


사토; 그래요. 그것은 농사짓는 쪽도 그렇고, 역시 먹는 쪽도 그렇다고 해야 한다. 지금은 슈퍼 등에 가면 일년 내내 토마토를 구할 수 있지요. 그것은 역시 이상합니다.


사사키; 역시 '제철'이 있다고 생각해요.


사토;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사키; 그래서 저런 똑바른 오이만 파는 건 저 같은 전쟁 중 태어난 인간에게는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소비자도그러한 것을 잘 생각하여, 한번 더 풍부한 농경이 만들어지는 조건을 곰곰히 따져야 한다.


사토; 가치관을 포함하여 재고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프로젝트 안에는 철학자도 들어가고, 여러 사람을 넣고 있는 겁니다. 


사사키; 그것을 이 프로젝트의 지도자인 사토 씨, 당신이 열심히 잘 지도해 주셨으면 합니다. (웃음) 


사토; 고맙습니다. (웃음) 그럼 시간이 되었기에 이 정도로 마치려고 합니다.




2008년 5월 17일 도시샤同志社 대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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