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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경제의 현황과 문제점

 

 

1, 스페인의 지배 (16세기 초~19세기 중엽)

 

쿠바는 1492년 콜럼버스가 발견한 이후 1511년부터 스페인의 식민통치를 받았다. 식민지배 초기에는 주로 담배와 커피경작지로 이용되었으나 점차 아프리카 노예를 활용하는 사탕생산으로 바뀌게 되었다. 특히 1762~1763년 스페인이 본국의 내부 문제로 쿠바에 대한 관심이 소홀해진 틈을 이용하여 영국이 쿠바에 진주, 대규모 제당공장을 설립함으로써 대규모 사탕 및 커피생산에 기초한 플란테이션 농업이 발전한다.

➡ 노예무역의 이유 : 백인에 의한 토착민의 전염병(천연두) 확산과 농업과 광업에 적합지 않은 수렵인들.

➡ 노예무역 과정

영 국

공산품 식료품, 원료

아프리카

뉴프론티어지역

(카리브연안, 중남미, 북미)

노예

(실제로 1980년부터 1865년 사이에 쿠바에는 약 60만 명의 아프리카인들이 노예로 유입됨으로써 19세기 중반에는 노예수가 52만 7천명에 이르렀다.)

노예무역으로 시작된 대서양세계무역은 카리브해 지역에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은 열대성 대규모 단작(monoculture)에 의존한 것으로서 이들 지역의 대외의존도를 크게 높이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즉, 단일작물 이외의 거의 모든 소비재나 중간원료, 공산품 등을 해외에 의존케 함으로써 이들 지역이 이른바 대외종속과 저발전의 표본으로 불리게 되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2. 쿠바의 독립운동과 미서전쟁(19세기 후반)

 

10년 전쟁(스페인과 세스페데스) → 잔흔조약 → 스페인의 정치적 개혁 약속 → 1895년 독립전쟁(호세 마르티) → 마르티 전사(1895년 5월) 이후 독립세력 확대

이 와중에 미국은, 쿠바의 사탕산업에 대한 투자를 크게 늘린다. 미국인들은 10년 전쟁으로 황폐해진 사탕수수 재배지를 매입함으로써 쿠바의 사탕수수 산업을 독점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쿠바에 대한 미국의 경제지배는 점차 심화되었으며, 1880년대는 쿠바가 생산한 설탕의 전량이 미국에 판매될 정도로 대미 경제의존도가 높아졌다.

미국은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 정치적으로 스페인의 쿠바 지배를 용인하는 입장을 취했으나, 1896년 4월 미국의회가 쿠바의 독립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채택함에 따라 정책이 바뀌었다.

 

 

3. 미국의 지배 (20세기 초반)

 

스페인 군대 철수(1899년 1월) ~ 쿠바 독립 선포(1902년 5월 20일) 까지. 미국은 1901년 3월 쿠바의회에 플랫트 수정안을 전달.

 

정권

기간

특징

내용

팔마 대통령

1902~1909

친미성향. 부정재선.

미군 군정(1906~09)

고메스

1909~1913

독립유색당 반란

3천여명의 흑인 살해됨

가르시아

1913~1921

부정선거. 챔벨로나의 반란

미군 파견

자야스

1921~1925

부정, 무능, 실패

-

마차도 정부

1925~1934

쿠바국민으로부터 환영

바티스타

1934~1944

배후 조정

멘디에타, 고메즈, 브루

마르틴

1944~1948

사회보장제도 확대, 토지개혁, 산업화 추진, 교육기회 확대, 부의 공정분배

국민들로부터 비난.

소카라스

1948~1952

바티스타

1952~1959

무혈쿠데타, 친미 강화

시위와 반정부운동 강압, 의회 정당 해산

카스트로

1959~

반정부운동

 

① 마차도 정부와 쿠바 경제

마차도 정부는 초기, 경제개형정책을 추진하였으나 마차도와 측근들이 개인의 부를 증대하는 데 힘을 쏟았다. 또한 경제대공황을 맞아 미국이 수입품이 고율의 관세를 부과함에 따라 쿠바의 사탕수출이 크게 감소되었고, 이에 따라 사탕생산이 크게 감소하여 쿠바 경제가 위축되었다.

 

 

4. 카스트로 혁명과 쿠바 경제 변화

 

혁명 이전

혁명 이후

쿠바는 정치적으로는 스페인의 지배를 받고 있으나, 경제적으로는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미국의 영향을 크게 받음. 쿠바에서 생산된 사탕의 대부분이 미국으로 판매되거나 미국을 통해서 세계 각국으로 판매. 쿠바 독립 이후에도 경제적 협력관계 강화. 1901년 양국간 통상협정을 통해 미국은 쿠바산 사탕에 대한 관세↓, 플란테이션과 제당공장 합병. 수출총액의 80%(1902~45) 수입 66%(1911~40) 수출액 중 사탕 80%

카스트로 정권 1959년 5월 17일 농업개혁법 제정 (일정규모이상 토지 국가 매입, 소작농과 빈농에게 분배, 외국인 토지소유 금지) 미국과의 관계 악화. 1960년 2월 소련부수상 쿠바 방문. 5월 소련-쿠바 외교수립. 1961년 미국과의 교역 단절.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경제적 협력관계 강화.

 

 

5. 제1차 경제개발계획(1962~65)과 1960년대 쿠바 경제

 

카스트로 혁명의 우선적인 목표의 하나가 경제운용의 다양화와 설탕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것이었기 때문에, 쿠바정부는 대외의존적인 경제구조를 탈피하고자 공업화와 식량의 자급화를 목표로 제1차 4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고 1962년부터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카스트로의 절대적 신임을 받던 게바라 산업부 장관은 ‘농업에서의 자본축적을 통해 산업화를 추진함으로써 국가발전을 도모한다’는 전략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1960년 10월에 시행된 2차 토지개혁은 사회주의 정권에서의 개혁이었다. 제2차 토지개혁은 개인 농지소유 상한선을 5카발레리아로 설정했고 ,1959년과 1963년 두 차례에 걸친 토지개혁의 결과 국가 소유 토지는 전체의 70%를 점하게 되었다.

그러나 게바라의 산업화전략은 자원배분의 왜곡으로 인한 설탕생산의 감소, 경제하부구조의 미비로 인한 물가앙등, 수출부진으로 인한 무역적자 급증, 재정적자의 악순환 등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특히, 산업화 정책으로 인해 피해를 보게 된 세력이 집결하여 게바라의 정책에 반기를 들면서 기본 정책의 모순과 한계를 비판하였다. 이러한 반대세력의 비난과 외환위기의 악순환으로 게바라는 권력과 권위를 상실하였고 그가 추진하던 산업화 전략도 중단되고 말았다. 사실상 과거 수세기에 걸쳐 시행된 노예제와 선진국들의 자본참여로 확립된 사탕수수 대규모 단작 체제라는 왜곡된 경제구조를 짧은 기간 내에 개편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사탕생산량도 감소됨으로써 쿠바 경제를 위기에 빠뜨렸던 것이다.

 

 

6. 1970년대 쿠바 경제

 

쿠바정부가 최우선순위를 부여하면서 추진한 설탕 1천만 톤 생산은 결국 실패로 끝났을 뿐만 아니라 다른 생산부분을 크게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물질적 유인을 부정하고 근로자들의 혁명적 자기희생을 강조함으로써 경제발전을 이룩하려던 쿠바정부의 계획은 오히려 정권의 안정을 저해하는 저성장의 악순환을 초해하였다.

 

1960년

1961~1975

1975~1984

대 소련 수출

17%

48%

64%

대 소련 수입

14%

45%

72%

 

한편, 소련은 쿠바의 경제적 불안정을 이용하여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설탕생산 부진으로 침체에 빠진 쿠바에 대해 원조와 차관규제를 늘이는 한편, ‘경제과학기술공동위원회’를 설치하여 쿠바정부의 정책결정에 적극 참여함은 물론 일상적인 정책결정과정 및 행정체계에도 간섭하였다. 아울러 쿠바를 COMECON(Council for Mutual Economic Assistance)에 가입시켜 동구권과의 국제 사회주의적 분업에 참여토론 하였다. 이에 따라 쿠바는 경제구조는 시장기능에 의해 조정되지 못한 채 정치적 이념적 결정에 따라 생산, 분배, 교역 등이 조절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혁명 이후 쿠바 경제는 소련에 대한 의존도가 크게 높아지게 되었다.

쿠바 정부는 또 신경제관리계획체제, 시장원리와 체제원리 조화, 공산사화 한계극복 노력, 국가권력 하에서 시장 메커니즘 작동, 물질적 유인제도 재도입을 위하여 노력했다. 그리고 코메콘과의 협력 하에 연평균 6% 성장을 목표로 하는 제1차 경제사회개발 5개년 개획도 시작 되었다. 그러나 제1차 계획은 원당국제가격의 폭락, 석유파동 등으로 인해 성장부진으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1980년 12월에는 제2차 5개년계획(1981~85)이 발표되었다.

 

 

7. 1980년대의 쿠바 경제

 

제2차 경제사회개발 5개년계획은 1차 계획보다 낮은 연평균 4~5%로 조정하였고, 설탕생산 목표는 1000~15000만 톤, 니켈생산 목표는 10만 톤으로 설정하였다. 또 소련으로부터 총 300억 루블 (약 350억 달러)에 달하는 재정적 뒷받침을 받게 된다. 쿠바는 비록, 경제구조면에서 많은 취약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소련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안정된 경제성장을 유지했고 소득분배, 문자해독 등에서도 상당히 발전된 상태였다.

 

평균수명 (연)

유아사망률(1000명당)

문맹률 (%)

도시지역 실업률(%)

아르헨티나

브 라 질

칠 레

멕 시 코

페 루

우루 과이

베네수엘라

쿠 바

70

63

71

66

60

69

69

74

36

71

24

53

82

38

39

13

4.5

25.5

8.9

17.4

17.4

6.1

15.3

3.9

6.1

5.3

17.2

11.8

11.8

13.1

14.3

3.4

표. 중남미 주요국의 사회지표

 

그러나 성장률을 기간별로 보면 1980년대 전반기에는 연평균 7% 수준을 유지하였으나, 1986~1989년 사이 0.8%로 하락하였다.

쿠바의 경제구조나 체질이 대소의존적 설탕 중신구조로 고착되어 가는 상황에서 일어난 소련의 변화는 쿠바에게 충격적인 것이었다. (1985년 고르바초프 등장) 설탕을 국제가격보다 높은 가격으로 수출하고 소련산 원유를 세계시작가격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공급받음으로써 경제를 유지하던 쿠바는 대안으로 진출할 수 있는 시장도 없었고 경쟁력도 갖추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8. 경제위기 (1989~)

 

1989년 이후 쿠바가 경제적으로 심각한 위기를 겪게 된 원인은 5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① 쿠바의 주요교역상대국인 소련과 동구제국의 급진적 정치, 경제개혁

② 미국의 지속적인 대 쿠바 경제제재 조치

③ 쿠바 계획경제 체제의 비교율성

④ 쿠바 경제에서 절대적 위치를 차지하는 설탕의 국제가격 하락

⑤ 경화부족으로 인한 서유럽국가 및 일본과의 경제, 통상관계 수립 곤란.

 

사회총생산(GNP)는 1989~1892년 사이에 45% 정도 위축되었고, 설탕 수출을 통한 외환수입 감소로 야기된 심각한 외환위기로 인해 조속한 회복은 힘들어졌다. 이 재정위기는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구조적인 것으로 쿠바의 교역이나 대외경제협력 및 거래를 과거 구소련 사회주의체제에 의존하던 것에서 벗어나 시장경제체제에 입각한 새로운 협력관계를 구축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가용외환의 급격한 감소로 수입이 줄어들음으로써 개인소비에 필요한 상품의 수입과 경제를 재편하는 데 필요한 투자가 어려워졌다.

 

수출

수입

미국

소련

미국

소련

1900

1942

1955

1959

1960

1961

1962

1970

1980

1985

1987

1991

1992

71

90

67

73

69

6

1

0

0

0

0

0

0

n.a.

n.a.

n.a.

n.a.

17

48

42

50

57

75

72

63.5

28.5

43

84

74

73

39

2

2

0

0

0

0

0

0

n.a.

n.a.

n.a.

n.a.

14

45

54

53

62

67

72

45.9

n.a.

 

 

-------------------------------------------------------------

이를 보면 쿠바의 경우 처음에는 미국, 나중에는 소련에만 의존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 미국의 경제 제재 + 소련의 붕괴로 헤어날 수 없는 구렁텅이로 빠지게 된 것이지요. 그걸 쿠바는 경제 구조를 새로운 방향으로 선회하면서 살아나지 않았나 합니다. 그 부분 때문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것이구요.

우리는 2009년 현재 대외의존도가 80%대를 조금 넘는다고 합니다. 단순히 수치로만 따지면 1942년의 쿠바와 비슷한 상황이네요.

1970년대 초반 내수시장을 키워야 한다는 학술회의가 있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경제성장만 생각해 수출 위주의 정책을 짜서 대외의존도를 더욱 높여 놓았습니다. 요즘 미국, 일본이 20%대, 중국이 50% 정도이고, 세계 최대 수출국인 독일이 70%대라고 합니다. 아무튼 우리 경제가 엄청 취약한 걸 알 수 있습니다. 스치는 바람에도 쓰러질 듯 위태로운 모습이지요.

우리 스스로 대외의존도를 줄이지 못한다면, 쿠바처럼 외부 충격에 의해서 구조조정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데... 한 번 그런 일을 IMF 외환위기 때 겪었지요. 그때 귀농자가 급격히 늘었다고는 들었습니다. 또 역귀농도 많이 했다고 들었구요.

그런 일은 다시는 없어야겠습니다. 우리 스스로 대외의존도를 줄여 나아가 안정적인 구조로 가야겠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우리 스스로 조정하지 못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충격에 나가 떨어지는 건 겪어봐서 알듯이 없는 사람들이 먼저니까요. 박정희의 빛과 그림자가 아직도 한국 사회에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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