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식량농업기구의 발표에 따르면, 1900년 이후 농업에서 작물의 유전적 다양성이 약 75% 감소했다고 한다. 이는 곧 그만큼에 해당하는 토종종자 및 가축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다수확 등을 목적으로 하는 신품종이 대신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육종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인간이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은 대략 1만 년 전부터인데, 그때부터 자신의 목적에 맞는 식물을 선택하여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씨를 받아서 조금씩 바꾸어온 것이 농경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를 통해서 인간은 문명을 건설하고 지금과 같은 풍요로움 속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육종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지나치게 풍요로움만 추구하는 지금의 사회구조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 산업혁명 이후 인간의 삶은 급속도로 바뀌기 시작했다. 과학기술은 그러한 산업혁명을 지원하는 든든한 지원군이 되었다. 농업에서도 농학이 발달하면서 식물이 성장하는 원리는 무엇이고, 인간이 어떠한 방법으로 통제할 수 있는지, 더 나아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밝혀내기 시작했다. 그 결과 지금은 유전자를 조절하여 생산성을 높이는 유전자조작 또는 유전자변형 생물(Genetically Modified Organism)까지 만들었다. 유전자조작 작물이 인간에게 해로운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그 위해성보다 왜 그러한 작물을 재배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서다.

 

과거 1950년대만 해도 한국의 인구 가운데 70%는 농민이었다. 한마디로 농업국가의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던 것이 1960~1970년대 산업화를 거치면서 농민의 인구는 점점 감소하기 시작했고, 2011년 말 전체 인구의 약 6%인 296만 명의 농민이 농촌에 남아 계속하여 농사를 짓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농민 인구의 감소는 비단 한국만의 일이 아니라 산업화된 선진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 농민 인구의 비율은 전체 인구의 2%선이고, 미국과 유럽연합은 1%선이다. 이렇게만 놓고 본다면 산업화는 곧 농민의 감소를 뜻하고, 농촌에서 떠난 농민이 공업과 서비스업으로 이동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농업 생산방식도 크게 달라진다. 예전 노동력이 풍부하던 시절에는 인력과 축력에 의존하여 이루어지던 농사일이 농기계와 외부에서 가져오는(사실은 사오는) 농자재에 의존하여 이루어지게 된다. 또 작물의 가짓수는 자급을 목적으로 하던 예전에 비해 뚜렷하게 감소하고, 몇몇 소득작물 이외의 것들은 농민들도 대형마트나 시장에서 사다가 먹게 된다. 바로 여기서 유전적 다양성의 상실, 다시 말하여 토종종자의 소멸이라는 현상이 발생한다. 집에서 먹을 것이 아니라 소득을 목적으로 농사지을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에 수확량이 적거나 농사짓기가 상대적으로 까다로운 토종종자는 일차적으로 폐기될 수밖에 없다. 그 자리를 다수확을 목적으로 육종된 좋은(?) 신품종들이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과거에도 농민에 의해서 작물이 더 나은 특성을 갖도록 하는 육종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농민이 가장 훌륭한 육종가”라는 말까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과거의 육종과 현대의 육종은 그 방향이 달라졌다. 왜냐하면 농업의 목적이 자급에서 판매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농민들이 더 잘 팔리고 그에 따라 더 많은 소득을 올릴 수 있는 종자를 선택하게 된 것이다. 벼라는 작물 하나만 예를 들자면, 예전의 벼는 키가 크고 까락이 달린 종자가 많았다. 그것은 과거에는 볏짚을 활용하는 데가 많았기 때문에 이삭이 조금 덜 달리더라도 키가 클수록 유리했고, 또한 새 피해 등을 방지하기 위하여 아무래도 새들이 먹기 까다롭도록 까락이 달린 것을 선호하여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벼는 최대한 키를 낮추고, 더 많은 이삭이 달리며, 까락이 없는 방향으로 육종이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예전과 지금은 작물에 원하는 바가 달라졌고, 그로 인하여 육종의 방향 자체가 다르게 설정되어 있다.

 

 

 

그러면 토종종자는 왜 중요한가? 우선순위를 매길 수는 없지만 가장 먼저 말할 수 있는 것은 유전적 다양성 때문이다. 1800년대 중반에 있었던 아일랜드의 대기근 사건을 다들 알 것이다. 이는 감자를 주식으로 하던 아일랜드에 감자마름병이 돌면서 800만의 인구 가운데 200만이 굶어죽고 200만 명은 외국으로 이주한 사건이다. 이 당시 감자마름병이 확산된 주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가 한 가지 품종의 감자만 심었다는 데에 있다. 곧 유전적 다양성이 획일화되어 있어 전염병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만약 다양한 토종감자가 존재하여 감자마름병에도 강한 품종이 있었다면 세계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날이 갈수록 기후변화가 심해지고 있다. 기후변화에 맞서 그에 잘 적응할 수 있는 유전자를 찾는 일도 다양한 토종종자가 살아 있으면 훨씬 수월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농민의 농부권이란 측면을 생각할 수 있다. 현재 농민들은 종자회사에서 종자를 사다가 심는다. 그 종자에 대한 권리는 종자회사에 귀속되어 있는 것으로서 농민들이 함부로 침해했다가는 손해배상에 휘말릴 수 있다. 이러한 문제와 관련하여 가장 유명한 것은 몬산토 등의 다국적 종자회사의 사건을 들 수 있다. 캐나다의 한 농부가 유채를 재배하여 판매하고 있었다. 그는 해마다 자신의 종자를 받아서 다시 사용하곤 했는데, 어느 순간인가 인근의 몬산토에서 개발한 유채 종자의 유전자가 벌과 나비에 의해 자신의 유채에 전달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는 몬산토에 의해 고소를 당했고, 법원은 몬산토의 손을 들어주었다. 종자는 농민이 수천 년 동안 농사지어오면서 대를 이어 물려오던 것이다. 그러한 역사를 지닌 종자에서 몇몇 특성을 이용해 새로운 종자를 만들고, 그 종자에 대한 판매권을 독점하는 일이 산업화된 농업에서 일어나고 있다. 종자를 육종하고 이어가는 일은 이제 개인의 차원을 넘어 기업에 의해서 주도되고 있고, 국가는 이를 종자산업으로 보호하고 육성한다. 그러한 과정에서는 농민의 권리, 곧 농부권이란 개념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물론 개인이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종자를 받아서 사용하거나 남에게 전하는 행위는 용납이 되지만, 캐나다의 퍼시 슈마이저Percy Schmeiser 씨의 사례와 같이 기업에서 언제 어떻게 제재를 가할지 모를 일이다.

 

마지막으로 문화의 보존과 계승이란 측면을 생각할 수 있다. 여러 가지 토종종자를 가지고 농사짓는 집에서는 하다못해 요리만 해도 예전의 맛을 살린 조리법 등을 활용할 것이다. 농사짓는 방법도 새로운 품종을 가지고 농사짓는 것과 달리 예전의 방식을 잘 살리거나 응용하여 농사지을 수도 있다. 또한 그러한 농사를 짓기 위하여 필요한 농기구들이며 농사력 등도 고유한 방식을 유지할 것이다. 이러한 모든 행위가 바로 문화이다.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되어 나오는 똑같은 가방을 들고 똑같은 옷을 입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문화가 다양하다고 평가할 수 있겠는가? 아니면 자기만의 개성과 취향을 살려 손바느질로 옷과 가방을 만들어서 사용하는 모습을 보고 문화가 다양하다고 평가할 수 있겠는가? 토종종자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농촌의 농경문화와 관련하여 그 다양성과 전통을 지키는 방법 가운데 토종종자를 보존하는 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토종종자는 케케묵은 낡은 것,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에 방해가 되는 것, 폐기해야 하는 것으로 치부해 버려서는 안 된다. 과거가 없는 미래는 없으며, 뿌리가 없는 열매는 없다. 토종종자는 과거이자 미래이며, 뿌리이자 열매이다. 그래서 토종종자를 잘 보존하는 일은 우리의 과거를 보존하는 것인 동시에 미래를 잘 대비하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처음 토종종자와 인연을 맺은 것은 2005년의 일이었다. 농사짓겠다며 천둥벌거숭이처럼 덤벼들었다가 시간이 지나며 전통농업으로 자연스레 관심이 이동했고, 그때 마침 안철환 선생님이 흙살림 전통농업위원회 활동을 권유하여 함께 전국을 다니며 전통농업과 관련한 취재를 다녔다. 하지만 전통농업은 과거의 기억 속의 일로만 남았을 뿐 그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하나 남은 것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토종종자였다. 이를 계기로 한국에서 토종종자로는 1인자이신 안완식 박사님과 인연을 맺게 되었고, 2008년부터는 함께 강화도를 시작으로 2012년 여주군까지 해마다 1개 군을 돌며 토종종자를 수집하는 팀에 들어가게 되었다. 토종종자와 관련하여 안완식 박사님과 안철환 선생님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두 분께 이곳을 빌어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그리고 돈도 안 되는데 공부한다며 허구한 날 집을 비우고 돌아다니는 나를 이해해주고 존중해 마지않는 아내 최옥금과 군식구 연풍이에게 사랑한다고, 앞으로도 잘 봐달라고 전하며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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