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농업 전반

뱃구레의 근대 -제4장 뱃구레의 증대와 먹을거리의 산업화

雜s 2026. 3. 20. 07:21

제4장 뱃구레의 증대와 먹을거리의 산업화 -대량 생산·대량 가공 시대의 도래

 

 

 

1. 먹을거리의 산업화 -대량 생산과 대량 가공

지금까지 살펴본 각종 외식 시설, 집단식과 공동 취사의 융성은 대량의 식재료 소비의 실현을 의미하고, 그건 근세 이래의 식재료 공급 체제의 대규모 재편을 촉진했다. 그렇다면 근대란 '먹을거리의 산업화'가 급속하고도 대규모로 시작되는 시대이기도 했다고 할 수 있다. 

메이지부터 다이쇼우 시기에 걸쳐서 소고기·돼지고기·서양요리·뱃놀이 요리(両国船料理)·남경 쌀(역주; 인디카 계통의 수입 쌀)·줄무늬엿(糸切飴)·도시락집·단팥죽집·떡국·감자가 유행하고, 우유나 빵이 출하되며, 부식이 되는 채소나 과일 등도 다양해졌다. 서양 요리가 보급됨에 따라 소스나 케찹 등 새로운 조미료가 더해졌다. 얼음을 공업적으로 생산하는 업자가 나타나고, 캔이나 양주의 생산도 시작되었다. 경음식점은 근세에는 읍내 사람이 가장 많이 이용했지만, 근대는 그것이 더욱 널리 보급된 시대였다. 메이지 말부터 커피가게, 밀크홀, 끽다점의 종류가 증가하고, 메밀국수, 우동, 소고기덮밥, 굴밥, 두부, 찻물밥, 고기 된장국, 미꾸라지탕 등을 파는 가게도 계속 탄생했다.(1)

예를 들면, 1925년에 간행된 「대오사카 기념 박람회지(大大阪記念博覧会誌)」에 의하면, 당시 오사카 시민의 인구는 203만 명이고, 하루 식재료 소비양은 채소류 11만 2300관(1관은 3.77킬로그램으로 약 421톤), 과실류 39만 4100관, 선어·소금말린고기류 7만 6500관, 닭과 달걀류 3300관, 조수고기류 8200관, 건물류 1만 2200관, 곡물류 6800섬(1섬은 10말, 4말이 1가마니로서, 1만 7000가마니), 일본주류 0.51섬, 두숙류 0.4섬이었다고 한다.(2)

이들 대량의 식재료 생산은 누가 어떻게 떠받치고 있었을까?

산업화, 공업화의 진전이 증가하는 노동자들의 식재료 소비를 충당하는 먹을거리의 산업화를 동시에 촉진한 것에 대해서는 영국이나 미국을 사례로 한 연구가 이미 있다.(3) 그러나 일본에서는 미식米食의 보급과 그 생산 공급 구조의 변화에 대한 연구가 있는 이외에는(4) 이 시기의 식재료 생산을 산업으로서 구조적으로 파악한 연구는 발견되지 않는다.

결론부터 말하면, 급속한 공업화를 떠받친 원재료, 연료, 식재료, 노동력의 공급원이 된 것은 농산어촌이었다. 예를 들면, 생사 생산을 위한 양잠업, 광공업의 연료가 되는 장작과 숯 생산, 도시 주민이나 공장 노동자의 식재료 증산, 가내공업 또는 공장에서 구하는 노동력의 공급 등은 모두 농산어촌에 의거하고 있었다. 이건 농촌이 상품 경제의 소용돌이에 한층 깊게 말려 들어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5) 1차 세계대전에 수반한 호경기, 쌀값 상승, 비료값 폭등, 임금 상승, 농업 노동력의 유출 같은 일련의 현상은 이러한 구조적 변화가 표출된 결과였다.

말할 필요도 없이, 도시의 식탁에 오르는 먹을거리는 농산어촌에서 생산되어 운반되어 온 것이었다. 즉, 이 시기의 산업화는 단순히 새로운 먹을거리나 식습관이 탄생했다는 것만이 아니라, 먹을거리의 대량 생산과 대량 가공의 시작을 의미하고 있었다.

이 장에서는 이와 같은 농촌과 도시의 식탁 사이에 있는 다양한 현상을 '절임'이라는 명조연에 주목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2. 절임과 근대 

 

 

코우코우香々, 코우코우, 타쿠앙沢庵', 타쿠앙

지금까지 살폅보았던 한그릇식당, 공영 식당, 「직공 사정職工事情』이나 『여공 애사女工哀史』에 기록된 여공의 식사, 스즈카마 공장의 식사, 공동 취사의 식사 안에서 반드시 등장하는 것은 '절임'이다. 

"절임인데 이건 무의 둥근 모양 그대로를 한 푼 정도의 두께로 잘라 놓아서, 이놈을 아주 소중한 듯이 2조각만 집어먹어 주는 것이다"(6)라는 기술이 있는 『여공 애사』에는 다음 같은 식단표가 자료로 게재되어 있다. 이것이 얼마나 빈약한 내용이었는지 하고 검토하기 이전에 눈을 끄는 단순한 사실은, 거의 매일 절임이 식탁에 올라오고 있다는 점이다. 이건 앞에 게시한 스즈카마 공장, 오코시 공동취사조합의 식단에서도 똑같다. 무의 쌀겨절임을 오사카에서는 '코우코우'라 하고, 도쿄에서는 '타쿠앙'이라 한다. 아무튼 절임, 절임, 타쿠앙, 타쿠앙이다.

 

 

당시 전국의 공장에서 식사 또는 한그릇식당이나 공영 식당의 한 접시, 나아가서는 배달상이 만드는 도시락에 거의 반드시 타쿠앙이 들어가 있었다고 하면, 그건 얼만큼의 양이 되었을까? 또한 그 무는 대체 누가 생산하고, 누가 절임으로 만든 것일까?

 

 

 

새로운 기호嗜好와 대개혁

야나기타 쿠니오가 「메이지 다이쇼우 역사 세상편(明治大正史世相篇)」에서 "따뜻한 밥과 된장국과 조미액 절임과 차와 하는 생활은 사실은 현재의 최소 가족제가 겨우 만들어낸 새 양식이었다"고 기술하는 점은 이미 지적했다. 공장에서는 체계적인 취사를 정비함으로써, 거의 이에 가까운 집단식을 만들어 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절임은 '조미액 절임'이 아니라 '타쿠앙'이나 '칠채 절임(福神漬)'일 필요가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조미액 절임은 장기 보존을 할 수 없고, 3일에 1번씩 정도로 새롭게 절여야 하기 때문이다. 몇 명의 식사를 준비한다면, 소금만으로 간단히 절일 수 있는 조미액 절임은 간편한 일품일 것이다. 그러나 대량의 식사를 매일 준비하려고 하면, 적어도 수고를 줄이기 위해서는 자르는 것만, 또는 보기 좋게 담는 것만으로 끝나는 타쿠앙이나 양념 절임이 취사장에서는 요긴히 사용되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이들은 장기 보존이 가능하며, 한번에 절이면 된다는 점이 이점이었다. 

「메이지 다이쇼우 역사 세상편」에는 '채소와 소금'에 대해 논한 부분에 절임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다. 

 

절임은 지금도 일본 마을의 향기로운 것에서 두드러진 하나로 꼽히고 있는데, 이것이 유행해 또한 어느 시대의 새로운 기호이며, 또 우연한 발명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채소의 눈부신 개량은 지극히 최근이 되고나서의 사실이어서, …… 개량 이전의 채소는 줄기만 잘 뻗던 것이었다. …… 칸사이關西 쪽에서는 절임이란 이름은 무에 한정되어 있다. 곧 이 절임을 즐기는 사람들이 차츰 적용을 줄기 이외의 것으로 미치게 했던 것이었다. 타쿠앙은 과연 그 이름의 승려가 생각해 낼 법한 대개혁이었다. 소금에 절인 채소가 물기가 돌아 오래 보존되지 않는 것을 막기 위해, 또는 식해의 이치를 응용한 것으로 보아도 좋을까? 곧 무를 충분히 말린 뒤 소금에 다량의 쌀겨를 더해, 한편으로는 맛과 색을 더하고, 동시에 이로써 나머지 수분을 흡수시켜 이 특수한 발효를 완성시키려 한 것은 공적이었다.(7)

 

우선, 절임에도 '시대의 새로운 기호'가 발견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절임이라는 이유만으로 꽤 오래된 어느 부식물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절임도 다이쇼우 시기에 크게 변화했다. 그 첫째는 절임의 대량 생산화이다. 각 가정에서 절이는 절임만이 아니라, 집단화된 뱃구레를 위해 대량으로 절일 필요가 생긴 것이다. 물론, 근세 이래 칸사이에서는 '쿠키야茎屋', 에도에서는 '츠케모노야漬物屋'라는 절임 제조 전문의 업자도 존재했지만,(8) 다이쇼우 시기에 들어서면 신규 업자가 증가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둘째는 절임 맛의 균일화이다. 이건 대량 생산에 수반한 현상이기도 하다. 집이나 지역에 전하는 독자의 맛 가감이라는 것보다 농회, 농업시험장, 농학 박사 등에 의한 과학적 절임의 레시피가 등장했단 것이 그걸 후원했다. 셋째는 새로운 절임의 탄생이다. 타쿠앙은 쌀겨로 절인다.(9) 칠채 절임에는 간장과 설탕이 필요하다. 대량으로 절이려면, 대량의 겨와 설탕과 간장이 필요했다. 그 배경에는 흰쌀밥의 보급이나 대만으로부터 들여오는 설탕의 이입이 관련되어 있었다고 추측한다. 

야나기타는 절임과 채소 재배의 관계에도 주목한다. 줄기만을 기르는 종래의 채소를 개량해 그밖의 부분, 즉 무로 말하면 '뿌리'를 비대화시키는 개량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건 특히 타쿠앙의 융성과 관련해서 생각하면 흥미로운 지적이다. 사실은 타쿠앙이란 것은 비교적 새로운 발명으로, 메이지 시기 이후 그것이 대량으로 생산되는 것에 이 시대의 특징이 있었던 것이다.

 

 

 

무의 행방

농상무성의 「도쿄의 채소 과실의 판매 조직에 관한 조사(東京二於ケル蔬菜果実ノ販売組織ニ関スル調査)」는 채소나 과실이 생산자로부터 소비자의 뱃구레에 닿기까지의 경로를 조사한다.(10) 이에 의하면, 채소 중에서도 무는 '타쿠앙'으로서의 수요가 많기 때문에, 타쿠앙 제조용 말린 무에는 특별한 경로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적혀 있다.

우선, 키타토시마군北豊島郡의 카미네리마무라上練馬村, 시모네리마무라下練馬村, 오우지마치王子町, 시무라志村 등의 주산지에는 마을 안에 많은 타쿠앙 제조자를 겸한 무의 생산자가 있었다. 또한, 전문 절임 제조업자, 현지 중매인을 겸한 생산자도 있었다. 그 때문에 시장에 말린 무 채로 출하하는 것은 드물고, 타쿠앙 제조자를 겸한 생산자는 타쿠앙으로 만들고나서 절임업자에게 판매하든지, 시내의 절임가게, 요리집, 밥집, 채소가게, 또는 도매로 판매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명기되어 있다. 중매인을 겸한 자는 자가 생산의 말린 무와 구입한 말린 무를 무 전문의 절임업자에게 판매했다. 절임업자는 이 말린 무로 타쿠앙을 제조하고, 시내의 요리집, 밥집에 판매했다. 후술하듯이, 재외 일본인에게 보내는 것도 있었다. 채소의 생산자가 스스로 소매 행상이 되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인분뇨 운반의 경로를 이용해 직접 소비자에게 타쿠앙을 가지고 가는 일은 자주 있었다.

채소나 과실이 사람들의 뱃구레에 닿기까지에는 복수의 업자를 거치기 때문에, 소매 가격은 생산자의 손을 떠난 뒤 2배에서 4배나 된다. 예를 들면 키타토시마군 오우지마치 키타쥬우죠우北十条에서 무 100개를 출하할 경우, 생무라면 생산비가 0.82엔인 바, 소매 가격은 2.5엔(생산자 이익 0.08엔, 도매 중개료 0.1엔, 중개 소매인 이익 1.5엔)이 된다. 타쿠앙으로 만들면, 생산비가 2.366엔인 바, 소매 가격은 5엔(생산자 이익 0.279엔, 도매 중개료 0.294엔, 중개 소매인 이익 2.061엔)이 된다. 무의 생산자에게는 좀 수고가 들어도 타쿠앙으로 만드는 쪽이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타쿠앙을 대량으로 구입할 필요가 있을 경우, 소매 가격은 생무의 2배가 되기 때문에, 비용을 삭감하려면 어떤 식으로든 궁리가 필요했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하겠다.

 

 

 

 

 

3. 공장·여공·절임·비료

 

집단으로 절임을 먹는다는 것

19121년 9월 15일에 우노 리에몬이 교토 오사카 고베의 공장 취사 담당자를 모아서 개최한 '취사회'에서는 '절임의 일'이 의제에 올랐다.(11) "절임은 우리나라 사람의 쌀에 버금가는 주요한 먹을거리이기에, 기숙사의 식당에서 절임의 문제는 결코 가볍지 않은 문제이다"라고 시작한 이 논의 안에서 각각의 취사 담당자의 말을 골라내 보자.

 

저희 쪽에서는 나고야 타쿠앙을 구입해 쓰고 있는데, 이것은 현지 절임 도매상에서 입찰로 구입하는 일도 있고, 나고야의 상인에게서 주문하는 일도 있는데, 대저 1관에 22전 정도의 가격입니다만, 여하튼 하루에 100관 정도 먹기 때문에 충분히 이것을 구입하려면 상당히 애를 먹고 있습니다.

저희 쪽에서는 센슈우泉州에서 절인 것을 구입하는데, 역시 100관에 22엔 정도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매실장아찌, 락쿄, 가지의 새 절임 등을 주는데, 매실장아찌라면 3개, 락쿄라면 17문, 가지는 소금절임으로 긴 가지를 1개 반의 비율로 줍니다. ······ 물론 이것은 아침뿐입니다. 타쿠앙의 필요한 양은 하루 1인분 32~33문 정도씩을 필요로 합니다만, 아침에 이런 식으로 해서 다른 것을 줄 때에는 매우 타쿠앙의 필요량이 줄어들기 때문에 그다지 비경제적이지 않습니다.

저희 쪽은 앞에 말한 대로 청부이기 때문에 그 청부인이 절임을 구입해서 오는데, 아무래도 마뜩찮아서 현재는 ······ 좋은 분량만을 그대로 먹이고, 맛이 나쁜 분량은 잘게 썰어 생강 간장을 뿌려 주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최근 어떤 계획을 세워 그 개선을 도모하려 하고 있다. 또한, 가지 등의 새 절임을 야간 작업 때에 한하여 때때로 주고 있습니다.  

 

하루의 소비량을 보면, 고작 절인이라고 넘길 수 없는 중요한 사항임이 실감된다. 타쿠앙 이외의 새 절임 등은 매일의 식단 안에서도 특별한 일품이었던 듯하다. 야간 작업 때만 특별히 먹을 수 있는 가지의 새 절임이 있다는 것은 흥미롭다. 거꾸로 말하면, 일상은 언제나 타쿠앙이라는 것이다. 

이들 절임은 입찰이나 직접 상인에게서 구입하는 방법, 청부로 절이게 하는 방법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외에 다음에서 보듯이, 자가 제조로 절이는 공장도 있었다. 

 

 

저희 쪽은 자가 제조로, 조달 청부인이 절임 창고를 가지고 있어서 땅에 술집의 작은통을 묻고 거기에 매년 이세伊勢 방면에서 무를 구입해 절이는데, 아무래도 누름돌이 어긋나는 게 생겨 많은 양 중에는 맛이 나쁜 것이 섞어서 곤란하기에, 그걸 여공에게 주면 한 입 먹어 보고 곧바로 버려 버립니다. 때문에 그다지 맛이 나쁘지 않은 분까지도 마구 버리는 형편이라 매우 비경제적이기에, 그래서 그런 것들 가운데 좋은 부분만을 점심과 저녁에 먹이고 나쁜 부분은 잘게 썰어 간장을 뿌려 아침밥으로 주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큰 통에 몇 백 관씩 절이는 건 성적이 좋지 않기에 역시 이번은 작은 통 제도로 변경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희 쪽에서는 자가 제조하고 있어, 한 구멍 3000관 정도씩 들어갈 만하고, 기와를 쌓아 올려 그 내부를 시멘트로 발랐다. 사각인 절임통이 14개 정도 있다. 이것에 오와리尾張와 현지 양쪽에서 구입한 생무를 그대로 1번 소금에 절여 누르고, 수분이 충분히 빠졌을 때 다른 구멍으로 쌀겨와 소금을 더해 다시 절인다. 이런 식으로 다시 절여 가면 참으로 성적이 좋아서, 지금까지 한번도 실패한 일은 없습니다. 

 

취사 담당자에게는 절임을 확보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고, 게다가 대량으로 매입하거나, 절이거나 하기 위해서 품질을 일정히 유지하는 일도 또한 난제였다. 이렇게 취사장의 입장에서 절임을 본다면, 집단식만의 절임 시스템의 궁리, 구입 합리화가 요구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흥미롭다.

아래의 사진은 다이쇼우 시기의 방적회사에서 짐을 부려놓은 타쿠앙 무이다(그림 4-1). 낭창낭창하게 구부러져 있는 것뿐이기에, 아마 절임용 말린 무라고 생각된다. 이것으로 자가 제조 타쿠앙을 만드는 것인 듯하다. 가정용과는 비교할 수 없을 대량의 무를 구입하고 있다는 점에, 여기에서는 다시 한 번 주목해 두고자 한다.  

 

그림 4-1 모스린 방직 본사가 구입한 타쿠앙 무

출처: 우노 리에몬宇野利右衛門 「공장 취사 요람(工場炊事要鑑)』 상권, 공업교육회, 1925년, 36쪽. 

 

 

 

 

 

타쿠앙 무 구입 실험 이야기

우노 리에몬은 1925년에 간행된 『공장 취사 요람』 상권에서도 제12장 '절임의 일', 제13장 '타쿠앙의 절이는 것에 대해', 제14장 '타쿠앙 절이기의 준비와 그 요건', 제15장 '타쿠앙 무 구입 실험 이야기'를 썼다. 이 가운데 제15장에는 무의 매입처이니 농촌과의 거래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12) 전술한 그림 4-1은 모스린 방직 공장의 취사장 뒤란에 쌓아 올린 절임용 무이다. 공장의 의뢰를 받아 아이치현에 가, 이 대량의 무를 매입해 왔던 건 카와무라 히로시川村寛라는 인물이었다. 여기에서는 그 기록에 바탕을 두고 카와무라와 동행해 아이치의 무밭으로 향하도록 하자. 

카와무라가 오사카의 공장에서 아이치현까지 무를 구입하러 갔던 건 산지와 도시 시장 사이에 가격차가 있기 떄문이었다. 또, 산지에 가서 선택하면 양품을 얻을 수 있다는 이유도 있다. 예를 들면 오사카의 텐마天満 시장에서 무는 10관문(역주; 약 37.5kg)에 50전, 이치노미야에서는 같은 양에 22전으로 반액, 이치노미야에서 오사카 사이의 운임 배달료를 더해도 9전 8리, 값이 쌌다. 또한, 현금을 가지고 농가에 직접 가서 직접 매매할 때에는 이치노미야 시장의 시세보다도 훨씬 싸게 구입할 수 있었다. 카와무라의 실험에 의하면, 이치노미야의 도매상을 통해 매입할 경우에는 무 4793관문에 83엔 82전, 거기에 더해 수수료 9엔 19전, 가마니, 가마, 새끼줄 값으로 10엔 76전, 일꾼 임금 3엔, 출하비 7엔 35전으로 합계 114엔 12전, 무 10관문당 21전 7리가 된다. 이에 대해 고키소무라御器所村의 농촌에서 직접 매입했을 경우에는 무 3522관문을 60엔 58전으로 구입하고, 가마니, 새끼줄 값으로 7엔 93전, 합계 68엔 51전, 무 10관문당 19전 4리였다. 비교하면 2전 3리, 값이 싸진다.

"비슈우尾州 지방의 무 산지는 그 구역은 매우 넓고, 키소강木曽川으로부터 동쪽 아츠타熱田 부근까지, 거기부터 나고야의 북쪽, 또는 치타知多 반도, 미카와三河 부근에서도 양질의 산품을 산출하기에, 그 산액은 실로 매우 높은 수준에 이를 것이다"라고 실험 이야기에서 기술된다.

이 주변 일대는 어디로 가더라도 많은 무를 농사지으며, 12월 무렵이 되면 그것을 뽑아서 '벼덕'에 걸어 말린다.  무를 살 때에는 이 '벼덕'을 목표로 가서, 무의 품질, 건조 상태를 보고 구입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역주; 일본에서는 여전히 벼덕에 타쿠앙 무를 걸어 말리고 있다.

 

 

아침 기차로 이나자와稲沢나 이치노미야로 가서 마을의 논밭으로 발을 옮기면, 밭의 소유주는 대개 그곳에서 일하고 있기에 "어떻소 이 무를 팔지 않겠소?"라고 말을 꺼내고, 가격을 물어 본다. 그렇게 하면 "얼마 정도면 사시겠소, 값을 불러 보쇼"라는 답이 돌아오기에, 그 전에 무의 시세를 역 앞의 여관 등에서 미리 물어 놓으면 좋다고 세세한 지적도 있다. 이러한 주고받음은 "저렴한 걸 사려고 하지 말고 좋은 걸 구하려는 마음가짐"이 첫째로 중요하다고 하는데, 화차에 1량부터 2량 분의 무를 구입하기 때문에 약간의 마음가짐으로 경비를 삭감할 수 있다는 점도 또한 중요했다.

카와무라는 이처럼 해서 치쿠사千種에 2회, 이치노미야에 1회, 이나자와에 1회, 오오부大府에 1회, 합계 5회 발을 옮겨, 2만 6000~7000관의 무를 매입하고 오사카로 돌아와 곧바로 이걸 자신의 손으로 2명의 조수를 부려 절여 놓고 다시 또 구입하러 간다는 형편으로, 모스린 방직 공장의 식당에서 1년 동안 먹을 만큼의 타쿠앙을 상인의 손을 빌리지 않고 조달했다. 이 때문에 이 회사는 매우 좋은 타쿠앙을 아주 싼 가격에 얻을 수 있었다.

   

 

 

 

비료 인도첩(肥料渡帳)과 절임 -여공·절임·비료의 순환

공장에서 일하는 여공들의 식탁에 매끼 거의 '타쿠앙'이 오른다는 이 단순한 사실로부터, 대체 무엇이 보이는 것일까? 다시 스즈카마 공장으로 발을 옮겨 보도록 하자.(13)

스즈카마 공장에서는 1900년부터 1905년, 1913년부터 1921년 사이에 약 10호의 주변 농가와 비료 매도 거래 관계에 있었던 것을 기록한 <비료 인도첩>(14)가 남아 있다. 이 첩 안에 기록되어 있는 비료란 곧, 여공들의 분뇨이다. 

스즈카마 공장에서 농가로 비료가 매도되는 동향을 보며 흥미로운 것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비료의 내용이 대변과 소변으로 구별되어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무 재배에는 물거름으로 오줌은 빼놓을 수 없는 한편, 똥은 희석해서 사용할 필요가 있었다. 첩의 내용을 보면, 농가는 대변과 소변을 따로따로 구입해 운반하고 있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봄(상반기)과 가을(하반기)에 걸쳐서 결산되며, 반기에 대변은 100짐(15), 소변은 200짐 전후가 거의 매년 매도되고 있다. 금액을 보면, 대변 쪽이 비싸다.

두 번째는 지불이 현금만이 아니라 볏짚, 무, 보리씨 등의 농산물, 또는 실꾸리 등의 직물 관련 작업에 의한다는 점이다. 농산물을 농가에게서 매입하고, 또는 일당을 지불하고, 그것들을 차감한 대금을 똥거름값으로 수령하고 있다. ①"합계 6엔 87전, 4엔 31전 무 농사, 3엔 16전 무 값 공제하고 60전 지급", ②"합계 7엔 45전, 무로 차감", ③"합계 7엔 56전, 그중 1엔 일당 차감, 공제해 6엔 56전", ④"마감 7엔 39전, 그중 46전 볏짚 4단, 차감해 7엔 23전 지불함", ⑤"합계 6엔 16전, 볏짚 대금, 실꾸리 대금 1엔 85전 차감해 4엔 63전" 등의 기재를 볼 수 있다.(16) 1903년, 1904년의 첩 내용에는 '무'만이 아니라 '달걀'과 교환하는 기술도 여기저기 보인다.(17) 주변 농촌으로 여공의 분뇨가 매도되고, 농가에게서 무가 납입된다.

그 무는 공장의 취사장에서 반찬이나 절임으로 조리되어, 여공들의 식탁에 오른다. 그걸 먹고 여공들은 노동력을 직물업으로 투하한다. <비료 인도첩>에서 보이는 건 이와 같은 농촌과 공업 사이에 성립되어 있는 순환적인 관계이다.(18)

또한 청취 조사에 의하면, 여공의 본가인 농가에 공장 안 밭의 채소 재배나 절임 작업을 맡기는 일이 있고, 채소나 장작과 숯을 매입하기도 했다.(19) 즉, 근대 일본에서 농촌과 공장 사이에는 지금까지의 연구가 주목했던 생산에 관한 '노동력'이나 '화폐'의 주고받음만이 아니라, 생산과 생활의 두 측면에 관계되는 '식재료'와 '연료', 그리고 '비료 인도첩'이 보여주듯이 '비료'를 매개로 한 물질 순환적인 관계가 성립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무 재배에는 대량의 시비가 필요하다.(20) 그 때문에 농가에게 똥거름의 확보는 중대한 관심사였다.(21) "읍내 근처인 곳에서는 도시 주민 집에 출입해 똥거름을 퍼내 조달했다", "철도용지 쪽에 개발된 신개발지의 셋집으로 푸러 가고, 멀리로는 나고야의 연병장까지 푸러 간 일도 있었다. 새벽, 큰 짐수레나 리어카에 거름통을 싣고 출발해, 한나절 일이었다"(22)라는 말은 도시의 주택지나 육군 제3사단 동쪽 연병장에서 똥거름이 농촌으로 공급되었다는 걸 여실히 보여준다.(23)

 

 

 

 

 

4. 채소 재배의 발전과 절임가게의 증가

 

질주하는 무 열차

공장과 노동자의 증가에 의해 식재료 수요가 증대하는 것과 연동하듯이, 나고야나 이치노미야 등의 주변에 위치하는 도시 근교 농촌에서는 채소 재배가 발전하기 시작했다.(24) 원래 노우비濃尾 평야는 키소강의 치수 사업과 새논 개발의 역사가 있어, 평야 남부의 카이토우군海東郡에는 높은 두둑 경작의 무논농사 탁월 지역, 북서부의 나카시마군中島郡에는 섬밭(역주; 시마바타島畑는 논 안에 섬처럼 설치된 밭을 가리킴) 경작의 밭농사 탁월 지역이 펼쳐져 있었다. 이 밭농사 지역은 그 뒤 두 가지 획기를 거쳐 도시 근교 채소 재배 지역으로 발전해 나아갔다(표 4-1). 첫째 획기는 면직물업과 목화농사의 쇠퇴에 의한 작목 전환이 생긴 1880년대이다. 목화농사가 급속히 쇠퇴하자, 목화를 대신해 뽕나무나 쪽잎(25)을 재배하게 되었다. 쪽잎의 그루갈이로는 무가 재배되었다. 1895년 무렵에 인도산 쪽의 수입이 시작되자, 뽕나무나 쪽잎의 재배지가 무 농사로 작목 전환이 되어, 채소 재배의 촉진을 볼 수 있었다.(26) 이것은 그 뒤, 썰어 말린 무나 타쿠앙 절임 같은 무의 가공업의 융성으로 이어져 나아간다.

 

표 4-1 나카시마군의 농업 생산 동향

출처: 메이지 30년(1897)은 「아이치현 권업 연보(愛知県勧業年報)」, 그외는 「아이치현 통계서(愛知県統計書)」 각 년에서 작성.

주1) 소수점 이하는 반올림했다.

주2) 기재가 없는 것은 '-'로 나타냈다.

 

 

둘째 획기는 도시, 상공업, 교통망의 발달에 따른 시장의 확대를 볼 수 있던 다이쇼우 시기이다. '유럽 전쟁 이래 상공업의 발발은 오사카 고베 지방으로의 수요를 한층 증가시켜, 지난 겨울 같은 생무를 수송한 양은 실로 막대한 것이었다"(27)라는 상황이 되어, 무를 대량을 적재하고 달리는 '무 열차'가 등장했다. "오사카, 효고 같은 곳은 과반이 각 공장에 공급되는 것이다. 무의 출하자는 ··· 각 공장과 특약 출하하는 것과, 또는 각 시장으로 출하하는 것이 있다"(28)라고 하듯이, 공장과의 거래가 증대했던 것이 그 배경에 있었다. 이 무렵이 되면, 무는 생무만이 아니라 절임용 소금절임, 절임, 썰어 말린 무(29)로 더욱 원격지로도 철도 수송하게 되어 간다.(30) 1927년이 되면, 채소 전체의 작부면적을 기재하게 되어, 무가 그 30~40%를 차지하고 그밖에도 몇 종류의 채소가 재배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쇼와 초기에는 이와 같은 채소의 수송을 위해 얼음을 사용한 냉장차에 의한 '냉장 수송'(31)과 통풍차에 의한 '통풍 수송'이라는 두 종류의 특수 수송법이 이용되었다. 통풍 차량은 1928년 12월 말 시점에 542량에 달한다.(32)

 

 

 

절임업의 확대 -아이치의 미야시게宮重 무와 도쿄의 네리마 무

1919년에 간행된 「아이치의 채소(愛知の蔬菜)」에 의하면 "타쿠앙 절임은 각 농가 일반에서 그걸 행하지만, 판매용으로 제조하는 건 아이치군愛知郡 고키소무라御器所村에 가장 많다. 이곳은 전술하듯이 그 명성이 가장 높고 ······ 수확은 12월 상순부터 그걸 하며 5개 또는 10개씩을 1단으로 하며, 부근의 나무 및 '벼덕'을 만들어 거기에 잎이 부착된 채 건조하고, 20~30일 동안 지나 절임업자에게 판매하며, 또는 자가에서 절임을 만드"(33)는 상황이었다.

하긴 아이치군 고키소무라는 근세부터 타쿠앙의 절임을 만들던 지역이었다.  「오와리 명소 그림」에는 그림 4-2와 같은 그림이 있다. 절임업자는 이미 이 무렵부터 존재했는데, 다이쇼우 시기가 되면 수요의 상승과 함께 절임업자의 수는 증가했던 것이라 생각된다. 

 

그림 4-2 고키소 타쿠앙 절임

출처: 「오와리 명소 그림(尾張名所図会)」 전편, 제5권에서 일부 발췌. 츠쿠바筑波 대학 부속도서관 소장.

 

 

아이치현의 미야시게 무가 타쿠앙용으로 자주 사용될 무렵, 도쿄 근교에서는 네리마 무가 마찬가지로 타쿠앙용 무로 활발히 재배되었다. 이 모습은 1932년에 간행된 오다우치 미치토시小田内通敏의 『제국 수도와 근교(帝都と近郊)』에 다음처럼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24)

농산가공품 중 가장 산액이 많은 것은 타쿠앙으로, 대개의 농가는 이걸 부업으로 경영하여 헛간의 차양을 길게 빼서 절임통을 비치한다. 부업이라기보다 오히려 주업이라고도 할 농가도 있고, 도쿄 타쿠앙절임은 인근만이 아니라 재외 국민이 많은 해외 재류지로도 수출되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교통기관이 열려 크게 판로가 확장하자 생산 3만 6000통 가운데 마을 안에서의 소비량은 2250통, 나머지인 3만 3750통은 아키타, 미야기, 니이가타, 돗토리, 오카야마의 여러 현, 중국이나 미국 등 해외로도 수출되고 있었다. 이 시기, 대량의 절임통이 열차에서 흔들리며, 또는 배로 바다를 건넜던 것이다.

또한, 그때까지는 말린 무로 이출되었던 것이 다이쇼우 시기가 되자 타쿠앙 절임으로 바꾸었다는 기술도 있다. "앞으로 더욱더 성대해질 전망이다"라는 상황이 되어, 도쿄 근교의 농가 경영에 대한 그 영향은 적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절임의 산업화 -무 품종의 고정화와 절임의 규격화

질주하는 무 열차에 가득 실려 있던 무로 눈을 돌려 보도록 하자. 화차에는 어떤 무가 실려 있던 것일까? 근세 이래, 아이치현은 목화나 쪽과 아울러 유수의 무 산지였다.  「오와리 명소 그림」에는 칸다神田에 버금가는 청과물 시장이 되었던 비와지마枇杷島 시장의 활기나 잘라 말리는 무의 가공 모습이 그려져 있다(그림 4-3). 채소 재배 중에서도 특히 미야시게 무와 호우료우方領 무는 그 중심이었다. 그 모습은 그림 4-4, 그림 4-5에서 엿보아 알 수 있다. 

 

그림 4-3 무 잘라 말리기

출처:  「오와리 명소 그림」 후편, 제2권에서 일부 발췌. 츠쿠바 대학 부속도서관 소장.

 

그림 4-4 비와지마 시장(1929년 무렵)

출처: 나고야 철도국 편찬 「오와리의 채소와 시장(尾張の蔬菜と市場)』 나고야 철도국, 1924년.

 

그림 4-5 잘라 말린 무의 출하 풍경(다이쇼우 시기)

출처: 『오와리 사진첩尾張写真帳』의 일부. 필자 소장.

 

 

지금까지 기술했듯이, 다이쇼우 시기에 들어서면 아이치현 안만이 아니라 교토 오사카 고베 지방도 포함해 공장을 비롯한 집단식을 위한 타쿠앙 절임의 수요가 급속히 높아졌다. 그리고 타쿠앙 절임도 대규모로 만들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원료가 되는 무 그 자체의 품종 개량도 진행되었다. 즉, 타쿠앙 절임에 최적인 균일한 길이와 굵기, 통에 딱 맞게 들어가는 크기의 무를 재배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이치현 농업시험장의 농림 기사였던 오자키 고헤이지尾崎五平治는 1925년에 "채소 원예는 장족의 발전을 해서 판매 출하기 일시에 편중되어 생채소의 산을 쌓는 일이 드물지 않아서 적당한 저장과 가공에 의해 출하 조정을 도모하는 것은 이 업종 성패에 심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라고 하여 「타쿠앙 절임(澤庵漬)』이란 기술서를 간행했다. 그곳에서는 타쿠앙 절임용 무의 품종에 대해 다음처럼 설명한다. 우선 형상은 굵고 짧으며 뿌리끝이 둥그스름하기보다는 가늘고 길며 뿌리끝이 뾰족한 것이 좋다. 그것에는 예를 들면 다음 같은 이점이 있다.

 

무의 형상이 가늘고 길며 뿌리끝은 길고 뾰족한 것은 타쿠앙 절임으로서의 형상도 가늘고 길며 아름다워, 일반에 널리 사랑받고, 특히 판매용으로서 환영받는 바이다. 또한 뿌리끝이 뾰족한 것의 건조는 가장 빠르고, 건조하면서 실패가 적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정도의 건조에도 적당하며 특히 완전 건조하기에 용이해진다. 그리고 뿌리끝이 뾰족한 것의 절임을 할 때, 특히 4말들이 통 같은 작은 통에 절이는 일이 용이할 뿐만 아니라, 틈새 없이 절일 수 있어서 장기 저장해도 품질이 나쁘게 변하는 일이 적은 것을 장점으로 한다.(35)

 

타쿠앙 절임은 무의 건조 및 절인 이후의 저장이 중요하며, 가늘고 긴 형상은 그에 적합하다고 한다. 다음으로 유의할 것은 무의 색이다. "타쿠앙 절임의 좋고 나쁨은 자가용으로는 큰 문제가 없지만 판매용으로는 빛깔은 형상과 함께 큰 관계를 가진다." 그 때문에, 무가 순백색인 것이 가장 적합하다고 한다.

 

무 몸의 전부가 순백색인 것은 제품의 빛깔 전부 동일하고 특히 착색을 행하지 않더라도 전체가 선명한 황색이 되어 외관이 매우 적절하며, 지방 관습에 의하더라도 지금 선명한 황색이 된 타쿠앙은 일반적으로 널리 환영받기에, 무의 몸이 순백색인 것은 타쿠앙 제조에 마땅해 가장 사랑받는 바이다.(36) 

 

그에 대해 아오쿠비青首란 품종은 색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타쿠앙에 적합한 특징을 갖춘 품종으로는 '네리마 무'와 '미야시게 계통 무' 2종이 있다. 그렇다 해도, 각 타쿠앙 생산지에서 품종은 아직도 다종다양하기에, 품종의 '개량'과 '통일'이 시각을 다투는 급무라고 이 책은 기술하고 있다.(37) 그림 4-6은 여러 가지 절임법 중에서 가장 우수한 것이라 여겨진 '평행平行 절임(揃漬)'이라 부르는 절임법이다. 이처럼 간극 없이 규칙적으로 가득 담기 위해서, 균일한 모양과 색을 갖춘 무의 수요가 높아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미야시게 무의 본고장에서는 1904년에 원산지인 아자미야시게字宮重의 땅에서 채종 조합을 설립하고, 위탁 채종지를 설치해 우량종의 선출에 노력하게 되었다. 나아가 1907년 농회는 총회의 결의를 거쳐, 니시카스가이군西春日井郡 농회의 감독과 본고장의 지도에 따라서 농회 직영 채종포를 설치해 순계 모본의 선택을 하고, 마을 안에서는 교잡하기 쉬운 십자화과 식물의 채종을 하지 않도록 하며, 통일된 우량 종자의 산출에 노력했다.(38) 이리하여 농사지은 종자의 수요는 해마다 증가해, 현 안에서 생산된 5000섬 이상에 이르는 종자는 1919년 무렵에는 대부분 전국에 공급하게 되었다. 

 

그림 4-6 타쿠앙의 평행 절임

출처: 오자키 고헤이지 「타쿠앙 절임』 타케후지武藤 서점, 1925년, 97쪽.

 

 

마을 농회에서는 각 농회원이 보통으로 재배한 우량품을 12월 중순에 마을마다 차출토록 해, 각 구장이 입회하여 본고장 기술원이 형상, 빛깔 등을 검사하고, 고유의 특성을 갖춘 것을 선발한 뒤 시가로 매입해 농회 특설 채종포에서 아주심기하여 종자를 채종했다(그림 4-7). 이건 '특별 종'이라 부르며 일부는 지방의 수요에 응하고, 그 대부분은 회원에게 분배해 아이치현에서는 미야시게 무의 재배가 더욱더 성행하게 되었다. 

그림 4-7 미야시게 무 원종 채종원(사진엽서, 연대 미상)

출처: 필자 소장.

 

 

근대에는 근세의 채소 생산과는 분명히 구별짓는 새로운 산지 형성이 이루어졌던 것을 종자상의 역사 분석으로부터 밝힌 아베 노조미阿部希望에 의하면,(39) 종자상이 선발·육종 기술을 확립함에 따라 고정종의 육성이, 균질성을 갖춘 대량의 채소 생산을 가능하게 했다. 아이치현의 미야시게 무에서도 이건 마찬가지였는데, 여기에서는 육종의 주체로서 마을이나 농회도 가담했다는 점, 품종의 고정화는 상품이 되는 절임 수요의 증대에 수반한 무의 규격화에서 빼놓을 수 없었다는 점이 밝혀졌다. 이 일련의 변화는 공장의 식탁에 매일 오르는 1인 두 조각의 '타쿠앙'이란 농산가공품의 대량 가공과 그 원료가 되는 무의 대량 생산이라는 '먹을거리의 산업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일이었던 것이다.   

 

 

 

 

   

 

5. 군수와 가정 -전쟁 중의 절임통

 

군량의 절임

이 장의 최후로 '절임'을 통해 전쟁 중의 먹을거리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타쿠앙을 시작으로 하는 절임은 지금까지 보았던 공장이나 식당만이 아니라, 군대의 식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군대에서도 절임은 기호에 적합해 3번 3번 빠지는 일 없이 모두 6~7문의 타쿠앙을 아삭아삭 씹는 맛은 식사의 맛을 배가한다.(40)

 

군대에서 하는 식사를 관리하는 육군 양말본창糧秣本廠 육군 일등주계一等主計였던 미요시 우네메三好釆女라는 인물은 1934년의 「양우糧友』에 <전쟁터 추송 절임에 대하여(戦地追送漬物に就て)>라는 보고를 실어 이렇게 기술한다. 이 보고에 의하면, 러일 전쟁 때에는 6종의 절임이 사용되었는데, 지게미 절임, 타쿠앙 절임, 나라 절임 등은 전혀 없었다. 그것이 시베리아 사변에서는 15종이 되고, 만주 사변에서는 23종의 절임이 양식이 되었다는 것이다. 타쿠앙은 시베리아 사변과 비교해 만주 사변 때에는 약 2배, 매실 장아찌도 시베리아 사변과 비교해 그 소비량은 2배로 증가했다.  

군대에서 절임의 효용은 첫째로 저장성, 둘째로 영양 측면, 셋째로 변통의 개선, 넷째로 치아 위생 측면, 다섯째로 식욕 증진에 있다고 한다. 특히 '영양 측면'에 대해, 열량은 거의 없지만 비타민과 무기 염류의 섭취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설명된다. 예를 들면 타쿠앙은 오래 절이면 비타민C는 거의 사라지지만, 쌀겨 절임으로 만듦에 따라 비타민B를 함유하게 된다. 각기병 예방과의 관련에서 이 점이 중요했다.(41)

평시에는 도시락의 부식으로 절임을 이용하고, 매실 장아찌는 방부, 전염병의 유행 예방 효과를 기대했다.

이와 같은 전장에서의 수요를 바탕으로 절임을 추송하는 듯하다는 것이 이 보고의 주지인데, 주계의 희망으로 ①보존에 견디는 것, ②용기는 수송할 때 견고하고 편리한 것, ③중량 용적이 가볍고 적은 것, ④분배에 편리한 것이 기술된다. 특히 '군용 물자의 규격'은 표 4-2에 보는 대로 엄격히 정해져 있었다. 그림 4-8은 적출항에 쌓아 올린 절임통 더미이다. 

 

표 4-2 절임의 규격

출처: 미요시 우네메 <전쟁터 추송 절임에 대하여> 「양우糧友」 9 (7), 1934년, 32쪽.

 

그림 4-8 통에 담은 종류와 기타 추송품 더미

출처: 위와 같음, 32쪽.

 

 

 

절임의 규격은 앞에 기술한 타쿠앙용 무에 균질성이 요구된 것에도 연결된다고 보아도 좋고, 그 의미에서 추송용 절임과 그 원료를 생산하는 농촌도 또한 총 뒤에 있으면서 절임을 매개로 전쟁터와 연결되어 있었다. 

 

 

 

 

절임의 징발과 농촌

전쟁 중에 절임은 가정용만이 아니라, 오히려 군수용으로 생산하게 되어 간다. 그걸 중심적으로 담당한 것은 전문 절임업자와 각 부현의 농회이며, 각 농업시험장에 의한 지도도 그곳에 가담했다. 

치바현 농회는 1938년에 「군수와 가정  절임의 연구(軍需と家庭  漬物の研究)』라는 책자를 간행한다. 서장에는 우선, 다음과 같다.

 

군수의 공출 그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의무이다. 군수 식료품으로 중요한 하나인 절임의 연구 그것은 간접적으로 국방의 충실이며, 총 뒤의 방어를 한층 견고하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또한 가정에게는 서로 일본인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3번, 3번의 식사에, 아니 술의 안주에, 차의 벗으로, 양식洋食의 뒤에도 중국 요리의 다음에도 반드시 없어서는 안 될 것은 절임이다.(42)

 

이 책이 어느 정도 읽혔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현 농회가 세운 가정학교에서 실험이 행해진 것과 농회가 간행했다는 성격으로부터, 현 안의 각지각소로 계몽을 위해 배포되었다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또한 절임의 영양적 가치나 성분 분석에서는 사에키 타다시의 『일본 식품 성분 총람日本食品成分総攬』이 이용되고 있으며, 영양학의 지식을 집어 넣은 내용이 되어 있다.  

이 책의 대부분은 구체적인 절임의 레시피로 되어 있지만, 말미에 첨부된 <치바현 임시 군수 출품 취급 요강(千葉県臨時軍需出品取扱要綱)>은 농촌에서 군으로 공출하는 경로를 알아 가는 데에 흥미롭다. 

요강을 몇 가지 발췌해 보도록 하자.

 

1. 농림성 및 육군 양말본창 협정에 기반해 "농산어촌으로부터의 군수품 공출 실시 요강"에 따라 본 현에서 육군에 공출하는 생산품은 본 요강에 의해 그것을 취급하도록 한다.
2. 본 요강에 따라 취급을 하는 생산물은 가마니, 새끼줄, 절임류, 말림류, 소금 쳐 말린 어패류 등으로 한다. 단 앞 항 이외의 생산물이더라도 군부에 공출하는 것에 대해 본 요강에 준해 그것을 취급하도록 해야 한다.
3. 공출에 관한 육군과의 계약은 지사가 그걸 하도록 한다. 

 

요강에는 '절임'이 공출품인 것이 명기되어 있다. 그림 4-9를 보면, 육군에서는 주로 건초, 가마니, 볏짚, 새끼줄, 말림, 절임, 소금 쳐 말린 어패류를 공출하고, 해군에서는 주로 미맥류, 목탄 등, 밀감 통조림, 각종 농촌 공업품, 부업품을 공출하고 있었단 걸 알 수 있다. 이들 공출품의 말단 생산자는 근로봉사단, 산업연합회, 산업조합, 농회, 출하조합, 어업조합, 현판련県販連, 기타 생산자 단체이며, 나아가 이것에 개개의 농가, 어가가 이어져 있었다. 이건 치바현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실시된 공출 체제의 조직화라 보아도 좋다. 

이 구도는 절임을 절이는 것은 곧 총 뒤의 책임, 의무, 방어라는 이 책의 주장과도 겹친다. 즉 여기에서의 절임은 농촌의 일상 생활이 전쟁터의 병사들의 뱃구레로 이어지는 하나의 경로에 지나지 않았다. 

그림 4-9 군수품 공출 조직(치바현)

출처: 치바현 농회農会・야마자키 토키지로우山崎時治郎 편찬 『군수와 가정 절임의 연구(軍需と家庭漬物の研究)』 치바현 농회, 1938년, 227-228쪽.

 

 

 

전쟁 중의 절임통으로부터 본 전쟁

다시 말할 필요도 없이 전쟁 중에는 많은 병사들이 먹을 음식이 필요했다. 이러한 군대 취사는 양말본창이 관리하고, 취사에 전문적으로 종사하는 병사가 존재했다. 봉천 독립수비대 제2대대 소속의 보병 조장曹長이었던 고토우 히데카네後藤秀乾는 그 한 사람이다. 고토우는 1921년에 2년 동안 양말 사무를 마치고, 새로운 근무에 종사하기 전에 후임 취사계를 위해 전달 사항을 정리해, 그것이 「군대 취사 근무의 연구(軍隊炊事勤務の研究)』로 간행된다.

이 책에 의하면, 고토우는 "절임의 자영은 연탄의 제조, 생채소의 저장과 더불어 취사 담당이 연구해야 하고, 노력해야 하며, 성과를 올리지 않을 수 없는 3대 요항의 하나이다"(43)라고 하며 직접 절임을 만들었다. 1년 동안 자영한 분량은 전체의 50% 이상, 1840관으로, 다음 해에는 80%의 자영을 목표로 한다고 적고 있다. 경리의 장부에도 그걸 기록하기 위해 "소요품, 즉 무, 배추, 오이, 가지에 필요한 식염 등을 이 장부에서 증빙 번호를 써서 받아들인다"(44)고 했다.   

절임에 필요한 채소는 대량이기에 제철 채소를 사서 경비를 낮추고 억제할 것, 소금 가감은 대원의 기호에 맞추어 가감할 것, 타쿠앙은 시간을 요하는 것이 많으며 용기와 장소를 요하기에 전쟁터에서의 취사에는 맞지 않는다는 것 등이 기술되어 있다. 또한, 고추 등을 소량 넣으면 식욕을 증진시키기에, 특히 초년병 등에게는 사랑받는다는 구체적인 기술도 있다.(45)

아래의 사진은 연습장이나 병영의 모습이다. 그림 4-10에는 병사들 앞에 밥통, 국통, 절임통이 늘어서 있다. 그림 4-11에는 식탁의 중앙에 절임 단지가 보인다. 이들 절임은 앞에 기술했듯이, 각지에서 징발되어 추송된 것이든지, 현지에서 취사계가 만든 것이었다. 어느 쪽이든, 절임은 전쟁터나 병영에서 뺴놓을 수 없는 것이었단 점은 확실하다. 

 

그림 4-10 후지 연습장의 근위 보병 2연대(1936년)

출처: 후지타 마사오藤田昌雄 『사진으로 보는 일본 육군 병영의 식사(写真で見る日本陸軍兵営の食事)』 光人社, 2009년, 176쪽.

 

그림 4-11 보병 연대의 점심 풍경

출처: 위와 같음, 124쪽.

 

 

평시의 병사 식사에 비교해 전쟁에서 병사 식사는 도시락이 많아지고, 또 생채소의 조달이 곤란해지기 때문에 절임의 수요가 점점 높아졌다. 그 때문에 전쟁터에서는 다음 같은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중국의 군대에서는 절임통을 차에 싣고서 행군하고, 도중 징발한 채소를 이 통에 던져 넣어 소금을 치고, 식사할 때 꺼내 겉절이 또는 채소로 먹는다고 한다.(46)

 

징발이란 말이 사용되고 있는데, 요컨대 현지에서 채소를 빼앗아 식재료로 했다는 의미를 무겁게 받아들여야 하는 문장이다. 중일 전쟁이나 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의 잔학 행위는 지금도 두 나라 사이에 깊은 골을 만들고 있는데, 그것이 일어난 원인의 하나로 청일 전쟁 이래 일본군의 특징이라 이야기되는 '병참兵站의 경시'가 있었단 것이 지적된다.(47) 병참이란 전선의 군과 후방의 기지의 연락선 위에 필요한 시설이나 기관을 설비해 군수의 부족을 보충하고, 불용물을 제거하는 시스템의 총칭이다. 그 정비가 경시된 채로 전진했기 때문에, 물자가 두절되어 징발이란 현지 조달로 물자를 보급할 수밖에 없었다. 병참 중에서도 특히 '양말'이라 부르는 식재료 공급이 뒤로 미루어졌기 때문에, 식재료의 징발은 때로는 강탈이라 할 수 있는 사태에 이른 것을 간과할 수는 없다. 이 실태를 밝혔던 토비타 사야카飛田紗綾香의 논문에는 식재료 부족에 의해 공복으로 괴로워하는 병사들의 말이 열기되어 있어, 전쟁터의 뱃구레 문제가 생생히 그려져 있다.

절임이라기보다는 군대의 식사 전반에 관련된 일인데, 전 육군 오장伍長으로 중일 전쟁 때 취사계였던 스기우라 유우이치杉浦右一의 인터뷰에서도 취사장에서 본 중일 전쟁의 모습을 엿보아 알 수 있다.(48)

 

[식사 시간은] 1분이나 2분입니다. 눈앞에 온 요리를 단숨에 입에 우겨넣고 끝났습니다. 재빠른 사람은 모두의 배식이 끝날 무렵에 이미 다 먹었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하는가 하면, 서둘러 밖에 나가 훈련 준비를 하면 그걸 본 상관에게 칭찬을 받아 출세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스기우라 자신이 중일 전쟁 이후에 소련군의 포로가 되었던 1년 반의 수용소 식사도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식재료도 나쁘고, 말에게 먹일 듯한 수수라든지 대두를 1개월분 모아서 주었는데, 대두만 먹으려 해도 먹을 수 없어, 큰 가마에 대두를 쪄서 각각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모두 어떻게든 대두를 가공해 먹으려고 했지만, 1개월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먹지 않으면 죽어 버리기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주변에 있는 풀이나 소련군이 버린 배추 뿌리를 모두 주워서 대두와 섞어서 함께 먹었습니다. 더는 더럽다거나 하는 말은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푸른 것을 먹지 않으면 몸이 버티지 못했습니다.(49)

 

'사회 문제는 위의 문제이다'라는 오가와 시게지로우의 말을 빌리면, 전쟁이라는 매우 심각한 사회 문제도 또한, 뱃구레의 문제임이 틀림없다. 식량난이 전쟁의 원인이 되고, 나아가 전쟁이 식량난을 일으킨다. 전쟁터의 절임통에서 보이는 것은 어떤 비상시라도 우리들은 먹어야 한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과 그렇기에 생사의 온갖 국면에서 가까운 원인으로도, 먼 원인으로도 뱃구레의 문제가 관련되어 있었다는 무거운 역사인 것이다. 

 

 

 

 

주석

(1) 와타나베 미노루渡辺実 「일본 식생활사食生活史』 吉川弘文館, 1964년, 270~294쪽. 

(2)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사 편 「대오사카 기념 박람회지(大大阪記念博覧会誌)』 大阪毎日新聞社, 1925년, 160~161쪽.

(3) ①John K. Walton, Fish and Chips and the British Working Class, 1870-1940, Leicester University Press, 1994. ②Katherine Leonard Turner, How the Other Half Ate: A History of Working-Class Meal at the Turn of the Century, California Studies in Food and Culture, 2014.

(4) 오오마메우다 미노루大豆生田稔 『쌀과 먹을거리의 근대사(お米と食の近代史)」 吉川弘文館, 2007년. 

(3) 오오카도 마사카츠大門正克 「근대 일본과 농촌사회 -농민 세계의 변용과 국가(近代日本と農村社会 -農民世界の変容と国家)』 일본 경제평론사, 1994년, 52쪽. 

(6) 호소이 와키조우細井和喜蔵 「여공 애사(女工哀史)』 岩波文庫, 2011년(초판은 1925년 改造社에서 간행), 215쪽.

(7) 야나기타 쿠니오柳田國男 「메이지 다이쇼우 역사 세상편(明治大正史世相篇)」 「柳田國男 全集』 26, ちくま文庫, 68~71쪽. 

(8) 앞의 (1), 212쪽. 

(9) 쌀겨가 부족한 시대에는 왕겨나 밀기울로 절이기도 했다. 

(10) 농상무성 농무국農務局 편 「도쿄의 채소 과일의 판매 조직에 관한 조사(東京二於ケル蔬菜果実ノ販売組織ニ関スル調査)』 농상무성 농무국, 연대 미상(내용으로 판단하건데, 아마 다이쇼우 말부터 쇼와 초기의 것이라 생각된다). 

(11) 우노 리에몬宇野利右衛門 편저 『직공 문제 자료(職工問題資料)』 제1집輯, 공업교육회, 1912년, 611~614쪽. 

(12) 우노 리에몬 『공장 취사 요감(工場炊事要鑑)』 상권, 공업교육회, 1925년, 473~488쪽.

(13) 이에 대해서는 유자와 노리코湯澤規子 「근대 비사이 직물업 지역에서 보는 농공 관계의 변용 과정 -스즈카마 공장 사료의 분석을 통해(近代尾西織物業地域にみる農工関係の変容過程 -鈴鎌工場史料の分析を通して)」 「農業史 研究』 49, 2015년, 41~58쪽에서 상세하게 논했다. 

(14) 스즈키 타카시鈴木貴詞 가문 문서 0873, 0874. 여기에서는 0874를 중심으로 분석한다. 

(15) 멜대의 양끝에 걸고서 혼자 어깨에 메고 다닐 수 있는 단위.

(16) ①~⑤는 스즈키 타카시 가문 문서 0874에 의한다. ①이토우 킨조우伊藤金蔵  1914년 후기, ②이토우 킨조우  1915년 후기, ③야마우치 기자에몬山内儀左衛門  1913년 봄, ④야마우치 기자에몬  1917년 봄, ⑤야마우치 기자에몬  1917년 오봉 이후.

(17) 스즈키 타카시 가문 문서 0873.

(18) 스즈카마 공장 이외의 예로, 「1920년 당좌장 1월 길일(大正九年当座帳第一月吉日)」(야마나오山直 모직 공장 사료 307)에도 '똥거름값 지불(下肥代入ル), 「1915년 2월 손익 감정 원장(大正四年二月損益勘定元帳)」(츠야킨艶金 흥업 사료 37)에도 '대소변 값(不浄代)'이란 기재가 여기저기 보인다. 

(19) 스즈키 타카시 씨에 대한 청취 조사(2013년 9월 13일).  

(20) 무의 시비에 대해, 아이치현 농회 편 「아이치愛知 원예園芸 요감要鑑』 마츠야마 카네사부로우松山兼三郎, 1910년, 180쪽에는 "퇴비는 주로 고죠우강五條川의 강바닥 진흙을 준설한 것으로서, 액비는 종자 파종할 때 줘야 할 건 오줌에 한정되고, 결코 똥을 쓰는 일은 없다. ...... 기타는 모두 목욕물 또는 오수로 사람 똥오줌을 희석해서 시용한다"고 설명되어 있다. 

(21) 다이쇼우 시기의 확대되는 제국 수도와 근교 농촌의 관게를 기록한 오다우치 미치토시小田内通敏 「제국 수도와 근교(帝都と近郊)』 大倉研究所, 1918년에는 "채소 재배 지대의 존립에는 그것을 소비하는 다대한 호구와, 그것을 재배할 만한 비료를 비교적 염가로 또 다량으로 얻기 쉬움을 필요조건으로 한다"고 한다. 이것은 도쿄 근교에 한정되지 않고, 이 시기의 도시와 근교 농촌에서 볼 수 있던 관계라고 생각한다. 

(22) 아이치현사편찬위원회愛知県史編さん委員会 편 「아이치현사  별편別編  민속民俗 2  오와리尾張』 아이치현, 2008년.

(23) 아이치 현립 농사시험장은 1916년에 「비료의 이야기(肥料の話)』라는 책을 간행한다. 그에 의하면, 1913년 아이치현 안의 비료 소비량은 4억 4847만 1813관으로, 그 가운데 판매 비료는 13.4%인 데 반해, 자급 비료는 86.6%를 차지하고 있었다. 자급 비료 중에서 가장 많은 것은 인분뇨로, 1억 7226만 6600관(1관을 3.75kg으로 환산하면 약 46만 톤)에 이른다. 이건 전체의 38.4%를 차지해, 소비량에서는 가장 많다. 아이치 현립 농사시험장 「비료의 이야기(肥料の話)』 아이치현 농사시험장, 1916년, 25~26쪽. 

(24) 채소 종자상의 동향으로부터 이 시기의 채소 산지 형성을 밝힌 연구로서 ①아베 노조미阿部希望 「근대 채소 종자상의 전개  도쿄부 키타토시마군 에노모토 토메키치 상점을 중심으로(近代における野菜種屋の展開  東京府北豊島郡榎本留吉商店を中心に)」 『農業史 研究』 44, 2010년, 90~101쪽, ② 같은 사람 「전통 채소를 재배한 사람들 -'종자상'의 근대사(伝統野菜をつくった人々 -「種子屋」の近代史)』 農山漁村文化協会, 2015년이 있다. 또한 ③시미즈 카츠시清水克志 「일본에서 양배추 생산 지역의 성립과 그 배경으로서 양배추 식습관의 정착 -메이지 후기부터 쇼와 전쟁 이전 시기를 중심으로(日本におけるキャベツ生産地域の成立とその背景としてのキャベツ食習慣の定着 -明治後期から昭和戦前期を中心として)」 『地理学評論』 81(1), 2008년, 1~24쪽은 소비 동향을 기반한 산지 형성론을 전개하고 있다.

(25) 한번 쪽을 재배한 밭에서는 목화는 발육하지 못한다. 그 때문에 쪽과 무의 그루갈이가 되었다. 모리 토쿠이치로우森徳一郎 편 「오와리 썰어 말린 무 발달사(尾張大根切干発達史)」 오와리 大根切千 동업조합, 1935년, 27~28쪽. 

(26) 나카시마군청(中島郡役所) 편 「나카시마군 제도사(中島郡制史)』 国書刊行会, 1988년, 125쪽에서는 "누에고치 가격이 앙등하면 갑자기 뽕밭이 증가하고, 한번 실 가격이 폭락하면 생육이 왕성한 뽕밭도 변하여 밭벼가 되고 채소밭이 되는 현상은 늘 목격되는 바이다"라고 한다. 

(27) 아이치 현립 농사시험장 편 「아이치의 채소(愛知の蔬菜)』 아이치 현립 농사시험장, 1919년, 196쪽. 

(28) 앞의 (27), 249쪽. 

(29) 오와리 썰어 말린 무 동업조합은 1897년에 설립되었다. 앞의 (25), 35쪽. 

(30) 나고야 철도국 『오와리의 채소와 시장(尾張の蔬菜と市場)」 나고야 철도국, 1924년, 2쪽에 의하면, "나고야는 동서 두 도시의 중간에 위치해, 이른바 중경中京으로서 인구 100만을 보유하며 소비의 중심을 이루고, 부근의 각 도시도 또한 인구 밀집되는 것만이 아니라, 상공업의 발전은 근교 도시의 팽창을 가져온 결과, 일반 채소의 수요가 더욱더 증가"한다는 상황이었다. 

(31) 이건 채소에 한정되는 것만이 아니라, 널리 식재료 전체에 관한 변화였다. 1차 세계대전 이후에 냉동창고, 냉동선 등이 등장해 원거리 수송이 가능해지자, 어패류를 중심으로 한 단백질원이 대도시의 뱃구레에도 도달하게 되었다. 또한 통조림 기술의 도입도 장기 보존, 장거리 수송을 가능하게 했기에 중요했다. 

(32) 앞의 (30), 115~116쪽. 

(33) 앞의 (27), 169~170쪽. 

(34) 오다우치 미치토시 「제국 수도와 근교』 大倉研究所, 1918년, 197~198쪽. 

(35) 오자키 고헤이지尾崎五平治 『타쿠앙 절임(澤庵漬)』 武藤商店, 1935년, 24~25쪽. 

(36) 앞의 (35), 27쪽. 

(37) 앞의 (35), 39쪽. 

(38) 앞의 (27), 4~13쪽. 

(39) 앞의 (24) ①, ②.

(40) 미요시 우네메三好采女 「전장 추송 절임에 대하여(戦地追送漬物に就て)」 『糧友』 9(7), 1934년, 25~33쪽. 

(41) 각기에 대해서는 야마시타 세이조우山下政三 『각기의 역사 -비타민의 발견(脚気の歴史 -ビタミンの発見)』 思文閣, 1995년 등에 상세하다. 

(42) 치바현千葉県 농회農会・야마자키 토키지로우山崎時治郎 편 「군수와 가정 절임의 연구(軍需と家庭漬物の研究)』 치바현 농회, 1938년.

(43) 고토우 히데키後藤秀乾 「군대 취사 근무의 연구(軍隊炊事勤務の研究)』 糧友会, 1927년, 13~14쪽. 

(44) 앞의 (43), 6쪽.

(45) 앞의 (43), 14쪽.

(46) 앞의 (40), 25~33쪽. 

(47) 토비타 사아야카飛田紗綾香 「중일 전쟁 초기의 병참의 실태 -상하이 파견군과 제10군양말 추송을 중심으로(日中戦争初期の兵站の実態 -上海派遣軍と第一0軍糧株追送を中心に)」 『日本女子大学 大学院 文学研究科 紀要』 14, 2008년, 121~137쪽. 

(48)  히로나카 잇세이広中一成 「'취사장'에서 본 중일 전쟁 -전 육군 하사 스기우라 유우이치 인터뷰(『炊事場」からみた日中戦争 -元陸軍伍長・杉浦右一インタビュー)」 『愛知 大学 国際問題研究所 紀要』 139, 2012년, 276쪽. 

(49) 앞의 (48), 2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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